Toronto, CANADA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감정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열등감을 꼽는다. 그것으로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고 가진 것을 폄훼하는 마음은 한 사람의 중심을 분명하게 무너뜨린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실패자라는 꼬리표를 스스로에게 달면서 나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뿐이라고 합리화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마음의 본질은 오만함과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하는 오만함과,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 마음들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몰랐고, 그 감정의 정체도 명확히 규정짓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그 감정을 규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견딜 수 없어서
시험에 낙방한 상실감과 공부에 지친 마음으로, 그럼에도 새로운 생활과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토론토Toronto로 향했다. 캐나다의 회사에서 인턴Intern으로 근무하기 위해서였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자격증 하나 없이 전문성을 조금이라도 키우기 위해 인턴을 해야겠다고 합리화했지만, 고작 2주짜리 (결국 6개월짜리가 되기는 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턴을 두고 전문성 운운했다는 데서부터 합리화는 실패였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을 견딜 수 없어 탈출한 것에 가까웠고, 당시의 나도 그를 마음 한 켠에서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감정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시험을 그만두었다는 데서 오는 해방감이, 처음으로 혼자서 해외살이를 해 본다는 충족감이 더 컸다.
당시에 나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분의 집에서 룸렌트Room Rent를 했는데, 내 나이 20대 초반일 때 30대 초반이던 신혼부부, 시연언니와 세형오빠의 집이었다. 막냇동생과 열 살 가량 차이가 나는 탓에 나이 차이가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인 나는, 그 집의 언니·오빠 부부와도 잘 지냈다.
그 부부는 내가 사회에서 만난 인연 중 처음으로 ‘결혼생활 롤모델Role Model’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었는데, 목요일 저녁이면 각자의 친구들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 그럼에도 주말은 꼭 둘이 함께 보내는 것, 집안일 분담을 합리적으로 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장착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내가 그때의 언니·오빠와 얼추 비슷한 나이가 되어 있는 지금, 두 사람은 아이 셋과 함께 밴쿠버Vancouver로 이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풍요롭되 가난한
회사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일하는 6개월 동안 실무적으로 인정받는 경험을 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상사에게 혼나 보는 경험을 했으며,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도 했다. 경영학이 실용학문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일정 부분 이론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배웠고, 반면 배운 것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하는 일을 해 보기도 해서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좋았다. 한국 기업의 판매 법인이었던 해당 회사에는 영업 쪽 직원들이 대부분 현지인이었는데, 한국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일해 볼 수 있어 성인이 된 후에도 해외에서 잘 적응해 나가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탈출은 일정 부분 성공적이었다. 긴 수험 생활을 하며 망가졌던 몸은 빠르게 건강을 되찾았다. 인턴 생활은 즐거웠고, 가고자 하는 길이 있었기에 미래가 마냥 불투명하지도 않았다. 그 나이대에 흔히 겪는 고난과 고민을 나는 어느 정도 지나 보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 속에서 나는 점점 시들어 가고 있었다. 거듭된 시험 낙방과, 만족스럽지 못한 입시의 결과를 외면할 수 없는 신분에 해소되지 못한 열등감이 극에 달했다.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려 애썼다. 그것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지도 알지 못했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나는 자신감이라는 탈을 쓴 자만심으로 나를 무장했다. 타인을 나만의 잣대로 평가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감추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날카로운 화살은 나에게도
나에게 뾰족한 태도이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타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나는 그런 그들의 태도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입고 있던 마음의 상처는 타인에게 입힌 상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던 듯하다. 미움의 화살은 공평해서, 결코 타인만을 향하지 않고 나에게도 향해 있었다. 내가 만든 잣대에 타인을 끼워 맞추면서 나 또한 그 잣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타인만을 평가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무시하고 폄하했다.
나라도 그런 과거의 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데, 함께 살았던 언니·오빠 내외는 당시에 많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나를 품어 주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불만스러울 수 없었다. 나는 이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인데 왜 너그러워져야 하냐고 생각했다.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은 곧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고, 안주하는 것은 게으른 것이며 고로 나쁘다는 참으로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누구나의 아픔
이 당시 내가 만든 잣대의 가장 큰 희생양은 내가 아닌 내 친동생들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과 확신이 나왔는지, 나는 동생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더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언니의 지위에서 가감 없이 얘기했다. 동생들을 자주 울렸고, 내가 하는 말에 비하면 세상은 훨씬 혹독하다고 생각하며 언니로서의 의무를 다한 듯 굴었다. 동생들은 지금도 당시 나에게서 받았던 상처에 관해서 얘기할 때가 있는데 (물론 지금은 그때의 언니를 이해한다고 웃으면서 얘기하는 착한 동생들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 나는 얼굴이 홧홧해진다.
이제 와 생각하면 동생들 역시나 그들만의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고난이 있고, 성장에는 각자의 성장통이 있으며, 누구나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간다는 것을 몰랐던 때였다. 그를 알아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많이 미안하다. 동생들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가끔 그들이 당시에 겪었던 힘듦에 대해 듣곤 하는데, 내가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 한 명으로부터라도 이해받고 지지받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제는 제대로 알기 때문이다.
동생들 뿐이 아니었다. 타인의 아픔과 실패가 나의 것에 비해 한없이 작고 하찮게 보였기에 나는 지독히 자기중심적이었고 공감 능력이 없었다. 가진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조차 당연히 나의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억울하다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가득한 욕심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무너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 태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빚진 마음이다.
열등감의 숙주宿主
열등감은 내 안에서 끊임없는 영양분을 공급받아 쑥쑥 자라났다. 적당한 열등감은 일정 부분 성장의 자극제가 된다는 입장이나, 이때 내가 가진 열등감은 결코 건강하지 못한 형태였다.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했다. 그들이 가진 것에 위축되고, 패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날카로운 가시를 두른 채 사람들을 대했다.
외부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찾았다. 인정 욕구는 과도해졌고, 정당한 비판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다. ‘당신이 뭔데 나를 평가해.’ 같은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반대로 내가 뭐라고 그들을 평가하는지에 대한 고려는 하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방어기제의 일종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떠올려 보면 당시의 나는 타인에게 상처주는 일에 망설임이 없지 않았나 싶다. 상처주는 내가 아닌, 상처입는 그들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나는 어느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답이란 허상虛像
그 시절에 한 가지 더 몰랐던 것이 있다면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이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생을 평가하는 획일화된 기준이 있고,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삶을 도태된 것인 양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 기준은 학벌이기도 했고, 돈이기도 했고, 외모이기도 했고, 그 외 흔히 ‘세속적’이라고 하는 많은 것들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 듯한 말들로 다원적 정의多元的 正義를 얘기하면서 정작 내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흔한 말도 실패를 합리화하는 말일 뿐이라고 자신만만하게 판단했다.
지금의 나는 이 말을 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이에 동의를 할 수는 없다. 이제 와서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바꾸고 싶다. ‘인생에는 누구나 자신만의 정답이 있다.’라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살아오며 구성한 스스로의 중심이 있고, 그에 맞춰 살아가고자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실망하기도 한다. 그것은 잘못된 마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므로 유동적이고, 그 변환의 힘을 우리는 ‘회복탄력성’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정답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자세를 덧없거나 헛된 것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렇지만 그 정답은 결국 내가 구성한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반대로 그것이 내 중심을 무너뜨리게 두지는 않을 것. 중요한 건 ‘나’를 지키는 일이라고……. 그것이 지금의 내가 도달한 ‘정답’이다. 언젠가는 또 달리 보일 수 있을.
나에게는 과분한
6개월로 연장한 인턴십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까지도 나는 끝내 변하지 못했다. 성장이 없는, 내면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나와 시연언니·세형오빠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사실상 그 시기에 맺은 인간관계로 여태까지 남아 있는 관계 중 유일한데, 나는 그토록 못된 마음을 가졌던 나에게도 이런 귀한 인연이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의 힘겨웠던 시간도, 기뻤던 시간도, 언니·오빠가 모두 지켜보며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두 사람에게서 나는 조건 없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편린은 나의 마음에 들어와 작은 씨앗이 되었다.
인간에게 ‘세계’란, 어떠한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범위에 한정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더불어 그렇기에, 인간이란 자신이 받은 감정만을 제대로 베풀 줄 알게 된다고도 했다. 이 말 자체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순진한 마음일지 몰라도, 사랑받지 않아 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럴 수 없다면 세상이 너무나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받아 본 감정은 어떠한 계기, 혹은 윤활유가 되기는 한다는 것이다. 언니·오빠의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내 안에 깊게 각인되어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내린 자리에 머지않아 꽃이 폈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나의 시간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 건 내 삶에 언니·오빠를 들여놓은 덕분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감정을 베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나에게는 과분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단단한 마음, 그 대단함
인생에 자신이 지고 가는 무게라는 건 상대적이어서, 누구의 것이 절대적으로 무겁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고난보다 나의 고난이 무거워요’라는 것은 투정이고, ‘당신의 고난보다 나의 고난이 가벼워요’라는 것은 오만이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 생각을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타인의 삶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내가 지고 가는 것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돌보는 일은 그 고난의 상대성을 알고 또 인정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마음이 단단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인생에 나의 아픔을 들여다 보아주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건만, 그를 인연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감사함도 간과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일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세 번째 편지.
나의 멋진 동생들에게.
언니는 너희에게 참 미안한 것이 많아. 열등감을 견디지 못하고 언니라는 지위를 마치 우월한 것으로 이용해 너희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면서 살면 안 되는데, 언니는 참 나빴다, 그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용서하고, 또 사랑해 주는 너희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 같아.
“자매란 서로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혼란스러운 세상 속 안전망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거든. 나이가 들수록 그런 걸 느껴. 무슨 일이 있어도, 흔하되 진부한 말로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려도 너희만은 내 곁에 있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달까. 근거 없는 믿음인가 싶다가도, 그게 자매이지 않나 생각하게 돼.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존재가.
나 또한 너희에게 그런 존재일까 궁금할 때가 많아. 그리고 그 질문은 늘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속 바람으로 회귀해. 그저 전하고 싶은 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라는 거야.
언니는 언제나 너희 편이니까.
인생의 동반자,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