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찬란한 작은 도시

Ames, USA

by Julia P

If you would be loved, love and be lovable.

- Benjamin Franklin



최초의 뚜렷한 기억은 드넓은 금빛의 옥수수 밭이다.


오래된 차는 포장이 덜 된 거친 도로 위를 쌩쌩 잘도 달렸다. 6살의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신할 순 없어도 아마 짙은 색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보았던 다채로운 풍경은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살던 곳이 대한민국의 도시이고 지금은 미국이라는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적어도 그 배경이 지금껏 나를 둘러싼 것과 다름은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전경은 한없이 단조로웠고, 그럼에도 어린 내가 퍽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끝없이 펼쳐진 금색 너울, 그 아득한 광경이 내가 미국에 대해 가진 첫 기억의 조각이다.


황금빛 장소와 인생의 황금기黃金紀


에임즈Ames는 아이오와Iowa라는 미국 중부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주州의 작은 도시이다. 돼지와 옥수수가 자라기로 유명한 곳으로, 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이 금빛으로 넘실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나는 6살의 나이에 첫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지낼 집을 구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아빠의 대학원에서 운영하는 캠퍼스 호텔에 머물렀는데, 그 캠퍼스가 참으로 평온하고 고풍스러운 미美가 있는 장소였다. 넓은 땅을 잘 이용하여 널찍하게 떨어진 석조 건물들, 그 사이의 분수대, 그리고 유유히 노니는 오리와 백조들. 완연한 봄이었고, 나는 금세 그 장소에 적응하여 신나게 뛰어놀았다. 날씨가 참 좋았다. 사는 동안 궂은 날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곳의 좋았던 날들이 기억의 대부분으로 남아 있다. 청명한 하늘과, 그 아래 이국적인 풍광 같은 것들.


그리고 기억 속 그 풍경 안에 나를 미국에 데려가 준 부모님이 있다. 당시의 나이에 부모님은 내게 어른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은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여겼고, 그랬기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 폭탄으로 두 분을 괴롭혔다. 이곳은 어디인지, 왜 우리가 이곳에 왔는지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대답이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난 그 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아빠의 석사과정을 위한 유학을 이해할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겠지만 부모님은 지금도 그 시절이 본인들의 황금기였다고 말씀하신다. 아빠의 경우 오랜 목표였던 해외 연수의 꿈을 이룬 것이었고, 엄마에게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이는 날들의 시작이었다. 내가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도 있으셨으나 그래도 어린 나이에 영어를 배우게 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셨다고 하셨다. 그러니 당시의 미국 생활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작부터 그러했다.


이별을 이해하기엔


다만 미국 땅에 내린 후 내가 기억하는 첫 소식은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캠퍼스를 등지고 소식을 전하던 아빠의 얼굴을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그 표정에 어린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슬프기에 그때의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고, 그렇기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아빠의 말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내 관심을 끌던 새하얀 새들을 보러 갔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던 듯하기도 하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어렸던 날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이다.


이때의 기억 탓인지, 오랜 시간 내게 죽음이란 건 생각보다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보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있는 무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기새가 어미새에게 각인하듯 무엇이든 첫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님이 의도하신 바는 아니었겠으나 그와 같은 환경에서 죽음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영상으로 기록한 듯 선명한 그 날의 장면들 이후 내 기억은 빠르게 지나간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갑자기 변한 환경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친구들을 떠나야 했던 것도, 적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를 또다시 바꿔야 하는 것도,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해야 했던 것도. 하루아침에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보낸 세계에 뚝 떨어져 버린 상황을 그때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라왔다.


내 이름은 줄리아Julia


아무래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난고難苦는 그곳의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바라고는 이곳에서 내가 쓸 이름이 한국의 문화센터에서 지은 줄리아Julia라는 것뿐이었고, 그럴듯한 영어 이름이 있는 것치고 영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엄마·아빠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를 어린이집Daycare에 보내셨는데, 이때의 기억은 정말 좋지 못하다. 누군가 말을 걸까 무서워 자는 척을 하기 일쑤였고,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다치면 아빠가 나를 일찍 데리러 온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텃세가 나쁘다는 개념이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말이 어눌하고 그들의 놀이법을 모르는 나를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드라마틱Dramatic한 변화가 있지도 않았다. 답을 아는 수학 문제라 손을 들고 발표했지만, 선생님이 알아듣지 못했다. 세 번째 시도하고는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말았다. 영어를 할 줄 몰라 비슷하게 생긴 중국인한테 한국말을 했다. 그때는 그게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에스엘ESL(주: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수업반이다.)에 들어간 내가 기가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지 부모님은 뛰어난 아이들만 들어가는 반이라고 내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다. 그리고 이 말을 학교에서 자랑처럼 했다가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 반응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 과정에는 나의 영어 선생님 메러디스Meredith가 있었다. 그는 가끔 전혀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말로 대화를 시도하는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차근차근 에이비씨디ABCD부터 알려주었다. 명절 때면 같이 명절 음식을 해 먹었고, 마음 둘 곳 없는 미국에서 내게 제2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메러디스에게 궁금증 대마왕인 내가 왜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느냐고 물어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학교에서 개최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날에도 메러디스가 나와 함께였다. 그의 응원과 따뜻한 애정을 기반으로 나는 점점 새로운 언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할 수 있게 되고 나니 느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일단 친구들과 놀아야 했다. 현지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리다 보니 영어는 자연스럽게 늘었다. 언어 습득력이 빠른 나이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국어보다 영어를 편히 사용하게 되었고, 곧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영어로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안녕? 반가워


미국에서의 또 다른 변화라고 하면 내 평생의 친구, 동생이 태어난 일이었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는데, 자동차 바퀴 옆의 눈을 삽으로 퍼내는 아빠를 집 안에서 창문으로 빼꼼 내다보던 기억이 선명하다. 동생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아이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그때는 질투의 감정이 먼저였는데, 동생이 어찌나 얄밉던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인 나의 모습이 아빠가 촬영한 비디오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게 어린 나는 점점 다채로운 감정들을 배워 나갔다.


흔히들 동생이 태어난 후 첫째의 심정적 고난에 관해 얘기하는데, 나도 어김없이 그 과정을 거쳤다. 7년가량을 외동으로 살아온 나는 갑자기 바뀐 엄마의 중심에 적응하지 못했다. 엄마를 빼앗긴 듯한 감정에 시무룩해하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 내가 단 한 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든지, 나에게 부모님의 관심이 덜했다고 느끼지 않은 이유에는 우리 아빠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지금도 그렇지만, 아빠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내게 미국은 온통 아빠와의 추억이다. 아빠와 보드게임Board Game을 하고, 유니버셜 스튜디오Universal Studio에서 토네이도Tornado 놀이 기구를 타려다가 겁먹고 우는 바람에 아빠에게 안겨 나오고, 씨 월드Sea World에서 함께 범고래 쇼를 보고 (그렇게 나는 범고래 조련사의 꿈을 키우고), 미국보다 빠른 한국 교육과정에 맞추기 위해 아빠로부터 구구단을 배우고, 같이 장을 보러 가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하나씩 들고나오고, 함께 나가서 롤러블레이드Rollerblade를 타고……. 학생이었던 아빠와 노는 건 참 재밌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좋았다. 한국에서는 아빠가 일하느라 바쁘고 매일 아빠를 늦게 봐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아빠가 계속 나랑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아빠에게 낯을 가리는 것도 한몫했다. 아빠는 나의 차지였고, 지금 생각하면 아빠와의 유대감은 그때 가장 강해졌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도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엄마가 동생을 돌볼 동안 아빠와 나는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특히 올랜도Orlando에서의 놀이공원 투어Tour는 내게 아빠와 함께한 천국이었다. 인형 탈에 사인Sign을 받겠다며 줄을 서는 나와도 아빠는 함께였고, 여러 놀이 기구를, 풀장 곳곳을, 신기한 사파리Safari를 아빠와 내가 함께 했다. 인형 탈 안에 사람이 있으니, 저들한테 사인을 받는 건 다 쓸모없다든가 하는 얘기를 아빠는 하지 않고, 내 기억 속 유일하게 비가 내리던 그 빗속에서 나와 같이 줄을 서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은 나의 동심을 지켜주는 데 꽤 진심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다정한 가장이지만 가끔 엄하실 때도 있었는데, 특히 내가 울 때면 단호하게 야단을 치셨다. 그때는 ‘아빠가 혼내니까 눈물이 더 나잖아.’라며 항변했었는데, 사실은 아빠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감정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이 마음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오롯이 부정적인 기제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유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내게는 부모님의 기대가 그 중 하나이다. 나의 행복한 모습이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람이라는 건 어쩌면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면 나는 그 나이대의 아이 답게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다른 인종이라는 존재를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사회적인 꼬리표를 떼고 ‘사람’으로 그들을 처음 경험했기에 오히려 편견 없이 모두를 대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나에게 아주 큰 자산이 되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나는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 크고 작은, 가시적이며 또 가시적이지 않은 다양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그 시선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린 시절, 나라는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또 누군가를 그라는 사람으로 오롯이 받아들여 보는 경험을 해보았던 덕분이다.


가장 친한 친구는 오드리Audrey라는 아이였다. 다른 인종, 종교, 성장배경 등을 가졌음에도 나는 이 친구와 처음으로 ‘단짝’이라는 개념을 경험했다. 학교에서도, 휴일에도, 우리는 늘 함께였다. 서로에게 있는 이벤트에 당연하게 참여하고 특별한 장소를 갈 때면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같이 캠프에 참가해서 밤이 깊어 가도록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딘가 초대를 받으면 꼭 상대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사람들이 우리를 ‘한 세트’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한국에 돌아올 때 목사님인 아버지를 두었던 이 친구가 나에게 쭈뼛거리며 선물을 내밀었었다. 포장을 풀어보니 안에는 핑크빛 표지의 성경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나는 그때 이 친구에게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였구나를 깨달았다. 자신 안의 내밀한 믿음을 공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얼핏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지금도 이 친구와는 연락이 닿아 있는데,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 둘의 엄마이고, 얼마 전 일반적인 것보다는 늦은 나이에 의과대학원을 졸업하여 의사로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귀감이 되는 친구이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추억의 저편으로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을 얘기하고, 내가 살았던 곳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내게 묻는다. 거기서 심심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나이의 나는 즐겁기 위해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족, 친구, 뛰어놀 수 있는 넓은 땅. 필요한 것은 그뿐이었다.


이 시기의 미국에 대해서는 대부분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 도시를 가득 채운 광활한 금빛만큼 반짝이는 시간이었다. 나는 행복한 아이였다. 2년 동안의 짧은 체류를 마치고 아빠의 석사과정이 끝나면서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년간 정들었던 동네와, 사람들과 헤어짐을 말하면서 또 만나자고 얘기했다. 이별에 슬퍼할 정도로는 자랐지만, 인생을 살면서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있다는 것, 또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을 만큼 어렸던 날의 안녕이었다.




첫 번째 편지.



사랑하는 아빠께.


나는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가끔 아빠랑 얘기하면서 웃고 있으면 지금 나는 언제나 이렇게 어리광 부리는 딸로, 아빠는 든든하고 재밌는 아빠로, 이렇게 시간이 영원히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희 제법 애틋한 부녀죠?


나의 어린 시절의 뚜렷한 기억들 속에는 항상 아빠가 있어요. 손잡고 그림 공부 책 사러 갔던 일,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아빠가 지켜봐 주셨던 일, 나와 무던히 비디오게임을 해 보려고 노력하던 아빠 (결국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저였지만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시던 것. 나는 아빠가 집에 오는 걸 늘 기다렸어요, 아빠는 모르시겠지만.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빌어 주는 아빠. 나는 가끔 내가 아빠를 위해서 행복해져야겠다고 다짐해요. 어릴 때는 울지 못하게 하는 아빠가 엄하게만 느껴졌는데, 내가 우는 게 속상했던 아빠의 표현 방식이었다는 걸 근래에야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야지.


아빠의 영원한 큰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