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 번째 꿈을 꾼 것은 현실에서 이 세계의 단초를 발견한,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난 뒤였다. 언제나와 같이 정원을 걸으면서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하기도,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기도, 또 아무 말 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너를 만났어.”
‘헤에.’
소녀는 조금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에 나는 지난번 듣지 못한 대답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분명 아는 사이였다.
“역시, 닮은 사람이 아닌 거지?”
‘글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거겠지.’
나는 그 말이 대화를 피하는 소녀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쯤 되어서는 제대로 눈치챘다. 자연스레 현실에서 만났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그리고.
“...외로워 보였는데.”
혼자였다, 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해서 소녀와 같은 반인 친구에게 묻기까지 하는 나답지 않은 일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그래?’
그러나 소녀는 그 감상에 조금도 상처를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순간 내가 다른 두 사람을 동일인물로 착각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여상한 반응이었다. 괜히 내가 울컥하는 바람에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째서? 꼭 미움받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어.”
그 말에 소녀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건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만 모두를 미워하려고 했으니까, 그 마음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걸 수는 있겠지.’
담담하게 얘기하는 소녀의 말을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 ‘하려 했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그를 조금 더 파고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왜 미워하려고 했는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으나 소녀는 회피하지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
‘좋아하게 되면, 욕심이 생기니까.’
“어떤 욕심?”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 살고 싶다는 욕심.’
첫 두 개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말은 이상했다. 나는 그를 제대로 짚고 넘어갔다.
“살고 싶다는 마음에 욕심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나? 본능이잖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도 본능일 수 있지.’
소녀는 그렇게 질문의 본질을 피해 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을 고수했다. 동의하지 않기에 그러냐는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알기라도 하듯 나를 힐끔 곁눈으로 살피던 소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거짓말 못하네.’
“.......”
‘아, ‘여전히’라는 말은 맞지 않나.’
영문을 모르겠는 말이었음에도, 나는 그 말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다.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별 망설임 없이 그를 언어로 만들어 냈다.
“너, 미래에서 왔어?”
만약, 현실의 그 소녀와 나에게 접점이 생긴다면. 그래서 이 소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라면.
내 말에 소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질문에는 조금 놀란 모양이다. 어쩐지 고소하다는 심통 가득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우쭐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응.’
소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에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불안해서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소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아마 표정이 꽤나 바보 같았을 것이다.
“뭐가?”
‘네가 나를 찾지 못할까 봐.’
그제야 나는 소녀가 의미하는 바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소녀 자신이 먼저 ‘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혼자이고 싶은 사람은 없어.’
“.......”
‘그러니까, 잘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사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를 다시 떴을 때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아름다운 정원만이, 내가 꾸고 있는 것이 단순한 꿈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자리에 그대로 푸르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