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Daybreak to Starlight
프롤로그
나는 ‘언젠가(One Day)’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를 타협하는 수단이자 자기안주에 대한 회피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타협도, 안주도, 회피도 가치중립적인 개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언젠가’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소망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꿈이나 계획에 붙게 마련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은 꾸기보다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고, 계획은 세우기보다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루지 못한 꿈은 무의미하며, 실천하지 못한 계획은 게으름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그를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라고 미화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언젠가’의 연속이 곧 내 삶의 궤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바랐던 것들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나를 형성하게 되었을까. 목표나 기대감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면 그 ‘언젠가’들이 모여서 나는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언제 무엇을, ‘언젠가’로 구분 지으며 현재를 버티고 또 살아갔을까.
인간의 삶과 꿈의 생애는 닮아 있다. 태어나고, 무르익고, 행운이 따른다면 이루어지며, 사그라지다, 남긴다. 물론 이보다는 복잡한 내막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틀을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삶은 붙잡고 또 놓아주는 과정의 연속인데, 언제까지 붙잡아야 미덕으로 남는지, 어느 순간부터 미련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부디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세상 속 나의 행복을 바라는 단 한 명의 존재가, 녹록지 않은 삶에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새벽, 그 고요함
어린 시절의 꿈은 그를 꾸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꿈이 생기는 방식 또한 그러하다. 고요하게 마음 속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응원 속에서 형성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꿈’이라는 것을 가졌던 시기를 떠올려 본다. 불완전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거기다 한없이 유동적이다. ‘꿈’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기 이전에 갖는 감정의 형태는 긍정적으로는 유연하고, 부정적으로는 불안정하다.
요약하자면, 가능성으로 들끓는 꿈이다. 무엇이든 이 시기의 꿈은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가능성은 오직 꿈이 생성되는 시기에만 충만한 종류의 것으로, 시간이 흘러 꿈의 형태가 단단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성질을 가졌다. 그는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데, 아쉬움과 함께 꿈이 구체화된다는 설렘이 그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첫 꿈은 ‘범고래 조련사’였다. 미국 올랜도Orlando에 위치한 씨월드Sea World에서 범고래 쇼를 본 이후에 갖게 된 꿈이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시간이면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범고래 위에 올라탄 내 모습을 그렸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가졌던 꿈이라고 나는 지금에 와서야 인정한다. 타인 혹은 사회 속에서의 나를 감각하기 이전, 오롯이 나 스스로의 내면만을 들여다보며 갖게 되는 꿈 말이다.
그런 꿈은 과연 무의미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허무맹랑할지 모르는 꿈이라도, 그를 꾸는 일이란 인간이 생애에서 다채로운 감정을 배워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꿈을 꾼다’는 감각, 무언가를 ‘바란다’는 감정…….
‘바람’이라는 마음의 본질은 참 신비한 면이 있다. 욕심과는 다른 결을 지닌, 그러나 단순히 원한다고 하기에는 절실한 무언가. ‘꿈’이라는 거창한 말이 붙는 것은 그 바람이 보다 먼 미래를 향해 있을 때이지 않은가. 그만큼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가 불확실하기에 그런 아득한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그토록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걸음마를 떼는 일이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듯이, 꿈을 꾸는 일 또한 같다. 그 꿈을 감당하고, 가꿔 나가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 느끼는 종류의 감정을 감당할 방법을 자연적으로 아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서, 사실 꿈은 나와 ‘함께 자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과정은 경이驚異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라는 과정에서 꿈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꿈과 이별을 하기도 한다. 인생의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범고래 조련사라는 꿈에는 안녕을 고했다. 슬프지는 않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 시기의 꿈이란 건 유동적이고, 이별이 곧 ‘실패’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다른’ 꿈을 선택해 나아갈 뿐이다. 나아간다는 자각조차 없이.
그게 참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꿈을 꿀 수 있는 시기라는 것. 개인의 안에서 꿈이라는 수많은 우주가 생겼다 사라지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꿈을 꿀 수 있는’ 근육을 키우는 일. 그것이 이 시기에 가지는 꿈의 의미이자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 챕터Chapter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하고 싶은 얘기는 정해져 있었다. 당신이 태어난 일이, 꿈 같은 일이라고. 탄생이야 말로 가장 반짝이는 꿈의 현현顯現이 아닐까, 늘 생각한다.
아침, 동이 트다
인생에 현실감각과 꿈을 결부시키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마도 소년기少年期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처음, 꿈을 꾸면서 그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요소를 고려에 넣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꿈’을 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부끄러움과 비웃음이 공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꿈’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어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이 시기부터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이라고 하여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꿈을 ‘크게’ 갖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있을 일의 경계를 찾는 과정을 거치는 일은 분명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꿈’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얘기 해보고자 한다.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곧 꿈이란 게 거창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매일 웃는 일이 하나라도 있기를’ – 물론 이 역시 ‘큰’ 꿈이라고 할 수 있지만 – 과 같은 꿈이 있는가 하면, 장래희망이라는 형태의 직업적 성취라는 꿈 또한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무수히 많은 결과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은 어떠한 지위이기도, 성취이기도, 사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소년기는 그 바람이 내포한 복잡한 감정들이 혼재하면서, 그에 대한 취사선택을 하게 되는 시기이다. 정확히는 인생에 무엇을 놓을 것이고,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를 알아가는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소년기의 꿈이란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움을 대동한다. 또한 생각보다 인간은 이 시기의 꿈에 쉽게 매몰되기도 한다. 꿈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유연함을 잃고, 선회旋回를 곧 ‘실패’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포기는 ‘나쁘다’라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사실 인생이라는 건, 수없이 붙잡고 또 놓아버리는 일의 반복이기 때문에, 포기는 가치중립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특징을 얘기하자면 이 시기의 꿈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다, 미움 받고 싶지 않다, 그런 감정들이 보다 구체화되는 시기라는 의미이다. 이 또한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바람은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으면 사람을 너무도 쉽게 망가트린다. 중심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는 사람은 쉬이 흔들리게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이 꿈을 지키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외롭지 않기 위해, 쓸쓸해 지지 않기 위해,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힘의 마중물이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은 사랑받는 일의 순환으로 이어진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감각하고, 그를 통해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소년기의 꿈, 또 꿈의 소년기에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버릴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았던 것을 다시 잡을 수도, 지킨 것을 언제든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탄력성이다.
점심, 뜨거움 아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라는 말을 조소하며 사람들은 흔히 얘기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고. 모두 말이 되는 명제이다. 그럼에도 나는, 꿈에 있어서는 ‘늦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꿈을 꾸기에 늦은 시기도, 꿈을 ‘이루기에’ 늦은 시기조차.
물론 이 명제가 성립하려면 꿈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꿈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 자격이나 직업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는 분명 협의狹義의 꿈이라고 할 수는 있을 테지만, 꿈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모두 수단일 뿐이다. 그 직업을, 자격을 얻음으로써 하고 싶은 ‘무언가.’ 그게 바로 진정한 ‘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가수 겸 배우 겸 작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즐기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고. 그리고 그의 콘서트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음악을 즐기는 모습에서 ‘꿈을 이루었다.’고 표현했다. 그런 것이다, 꿈은. ‘가수가 되겠다.’든가, ‘앨범을 백만 장 팔겠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음악을 백만 명이 들어주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그 바람이 바로 ‘꿈’이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그저 ‘변호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 직업을 갖는 것이, 그 지위에 다다르는 일이 곧 나의 꿈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도달하게 된 결론이 있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 사는 일이 덜 버겁다고 느끼기를’ 소망한다. 그를 변호사로서 할 수 있어도 좋고, 개인적인 삶 속에서 해낼 수 있어도 좋다. 업무를 수월하게 만드는 데서부터, 인생의 슬픔을 덜어내는 일까지. 숨쉬는 일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도록.
청년기를 우리는 꿈을 꾸는 시기이기보다 꿈을 이루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소년기를 거치며 이미 구체적이고 확고한 꿈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사회가 일견 강요하는 것이다.
압박감을 무시하라든가 그에 초연해지라고 섣부르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상대가 누구이든, 무엇이든, 결코 지지 말라고. 소년기의 꿈이 의미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나, 그 시기는 꿈을 확정 짓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시기에 생의 전반에 대한 꿈을 결정하라는 압박은 일견 폭력적인 부분마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에 굴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 시선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꿈’이라는 건, 결국 스스로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서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단순 직업이 아니라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청년기는 충분히, 꿈을 ‘꿀 수 있는’ 시기이다. 나아가 ‘꾸어야 하는’ 시기이다. 물론 단순히 꿈을 꾸는 것을 지나 그를 이룰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기도 할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또 다른 꿈을 꾸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만족을 몰라야 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정확히는, ‘감사함’을 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잃지 않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을 일’에 대한 탐구……. 그 모든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곧 ‘삶에의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끔 등을 밀어주는 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추진력을 잃은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지루하지 않을까.
오후, 나른한 햇살 속
꿈을 이루어가는 시기라는 것은, 꿈을 꾸기에 늦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물적, 정신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에너지 및 자원은 한정적이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를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중요한데, 꿈을 꾸는 데에 쓰이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꿈을 이루는 데 보다 삶의 많은 요소를 사용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꿈은 기억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이룰 기회가 온다. 그는 우리의 생각보다 이르지 않을 수 있다. 꿈이란 건 사실 조급해 하면 할수록 달아나는 성질을 가졌기도 하다. 열렬히 쫓을 때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열정으로 쌓아 올린 것들이 언젠가 나를 꿈에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도달하게 해준다. 손을 한껏 뻗어도 쥘 수 없던 것들이, 아주 쉽게 손에 들어오기도 한다.
이는 반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꿈을 이룰 기회는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잊어버리면, 꿈을 이룰 기회 역시 영영 잃는 것이라고. 그러니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인생이 붙잡는 것과 놓아버리는 것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꿈의 끝자락은 가슴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을 이룬다는 건 ‘인생을 바꾸는’ 일이다.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꿈을 이루기 전의 자신, 즉 꿈을 ‘꾸던’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긍정적으로는 돌아갈 필요가 없는 단계이기 때문이고, 부정적으로는 마냥 동경하기에는 너무 많은 ‘진실’을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벅차오름이 있는 탓이다. 그건 분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희열의 순간을 선사해 준다.
단순히 ‘목표’를 달성한 순간의 기분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랫동안 나의 안에 키워온 꿈, 어느덧 나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세상에 현실화되는 순간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가슴이 한없이 충만해지는 느낌.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감각. 삶의 색채가 한없이 다채로워지고, 생의 감각이 활성화되는 순간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 없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그러니 ‘찰나’가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되뇌고 또 곱씹을 수 있는 소중한, 삶의 ‘조각’이다. 그 자리에서 퇴색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다, 나의 어둡고 괴로운 시간도 함께.
그 조각을 인생에 맞추는 경험은 분명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든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고.
저녁, 저물어가는
꿈을 이룬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누군가의 꿈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꾼 오래된 꿈이, 곧 누군가의 꿈으로 이어질 때. 나 역시 이 감각은 느껴본 적이 없는 단계이지만, 아마 정말 멋질 거라고 생각한다.
동경의 대상이 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그리고 나의 꿈이 ‘이어진다’는 것. 나만의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사그라져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일견 경건하게 느껴지는 그 현상에 나는 어떠한 환상을 갖고 있다. 꿈이 순환하는 일. 그건 곧 삶에의 의지가 순환한다는 의미와 같지 않을까.
여기에서 나는 꿈의 개념을 조금 넓히고 싶다. 무언가를 바라는 ‘감정’ 그 자체라고 말이다. 즉, 꿈이란 건 어떠한 ‘느낌’에 가깝다고 정의해 본다. 대상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추상적인 삶, 혹은 구체적인 사람. 자신의 기쁨, 또는 타인의 행복. 그 모든 것이 개인이 바라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 역시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 나의 행복을 바라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와 같은 성취를 소망하는 일, 나라는 ‘사람’의 일부를 동경하는 데 이르기까지. 멋지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타인에 대해, 타인의 삶에 대해, 타인의 성취에 대해 그런 마음을 가져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음은 질시를 넘어선 순도 높은 감정이기에 아름답다는 감상이 일기도 한다.
꿈을 이루고 나면, 타인의 꿈이 되기 이전에 그 꿈에 배신당하는 순간 또한 올 수 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과거의 성공이, 이루어 낸 꿈이 도리어 발목을 잡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음 ‘꿈이 이루어지던 순간’의 기억을 퇴색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꿈을 이루고 난 후에 일어난 일 같은 건 오롯한 별개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것.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폄훼하지 말 것.
‘지킨다’는 건 중요하다. 나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였던, 그를 이루는 벅참을 느끼게 해 준 순간과 대상을 지키는 일. 나에게 ‘소중한’ 것을 제대로 지켜내는 일. 그건 내 삶을 지키는 일과 같다고, 나는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확신한다.
인생은 소중한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쁨과 슬픔을 포함하여, ‘의미 있는’ 감정의 동요로. 그러니 그 떨림을 소중히 여기자. 잃지 말자. 잊지 말자.
밤, 잘 자요
죽음이란 무엇일까. 사라짐, 이별, 끝, 종말……. 그와 결부되어 생각나는 많은 개념과 단어들이 있다. 그 모든 정의가 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 마지막마저, ‘꿈’의 일부일 수 있다면.
생의 마지막 전경이 무엇이면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꽃이 흐드러진 나무 밑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시야에 담기는 것은 아름다움이면 좋겠다고.
우리는 흔히 죽음을 외면하고 살지만, 사실은 그를 제대로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단계’에서의 꿈은 끝나는 일. 그리고 그 꿈이 다음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일임을 깨닫고 나면, 죽음은 생각보다 쓸쓸하지 않다.
나는 죽음이 결국엔 남겨두고 가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이 있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즉,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럼에도 이어지는 것’이라고 결국엔 생각하게 된다.
이건 내가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꿈이기도 하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은 유아적인 발상일 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막연한 두려움을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치환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은 중요하다. 오롯이 조우한 후에야 비로소 그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으로 돌아와서, 꿈이 죽는 일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꿈은 늘 유동적이다. 어느 날엔 가장 간절했던 무언가가 다른 날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꿈은 우리를 탓하지도, 왜 마음이 변했느냐 따져 묻지도 않는다. 그저 보내준다. 다음 꿈으로 나아가는 등을 다정하게 밀어준다. 언젠가 절실하게 꾸었던 꿈을 뒤로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선택했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그러하다.
세상사世上事 모든 것이 그러하듯 꿈 역시 유한하며,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그를 이루었기 때문이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든, 혹은 그저 감정적인 변덕으로.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슬퍼할 필요는 없다. 소중한 감정이 사라지는 일은 일견 아쉬울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새로운 꿈이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떠나간 이의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되듯이. 인간이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니 놓아줌에 망설일 필요는 없다. 아쉬울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그 마음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도 좋을 것이다.
(아주 짧은) 에필로그
나는 ‘언젠가(One Day)’라는 말을 참 많이 좋아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리하여 좋아하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되뇐다. 언젠가, 반드시……
– 언젠가의 수많은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