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에 묻힌 목소리로(1)

라즐로 네메스의 영화 <사울의 아들>에 관하여

by platypus
라즐로 네메스 감독, 영화 <사울의 아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이미지)


“우리가 무엇을 견뎌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는다.”


- 류드밀라 이그나텐코(순국 소방대원 바실리 이그나텐코의 아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p. 52. 中



들어가며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의 한계는, 이미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외에도 이들 영화의 아카이브로서 홀로코스트 자료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더는 변별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제 여타 영화에서 다루는 홀로코스트는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뿐더러, 계속 만들어지는 이런 류의 영화들 또한 과거 영광의 아류적인 답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몇―많은―홀로코스트 영화의 공통된 특징은, 영화의 초점이 주인공의 생존 의지나 의로운 행위와 그 결과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본인의 의지와 행위를 통해 나치즘이라는 악으로부터 존엄―목숨―을 지키거나(이 경우 주인공은 희생자인 유대인이다), 다른 이들을 구한다(유대인이 아닌 외부인으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빼내고자 하는―대게 실화에 기초한―용감한 인물이다).


문제는 이들 영화의 서사가 전형적이라는 것이고, 이는 분명 석연치 않은 점이다. 서로 다른 주인공과 인간 군상이 등장하더라도, 이들 영화의 서사는 대부분 마스터 플롯적인 특징을 갖춘 듯 보인다. 행복한 시절, 드리우는 나치의 그림자, 혼돈, 탈출하는 주인공과 그의 행적(또는 외부인으로서 희생자들을 구하려는 인물의 용감하고 위험한 행위), 생존(혹은 의로운 행위의 성공),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문구까지. 물론 이제껏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많은 영화들이 나왔고, 앞으로도 마스터플롯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가 나올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모든 홀로코스트 영화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앞의 영화들의 석연치 않은 점을 넘어선 다른 시선, 다른 이야기, 숨겨져 있는 다른 진실을 기대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전경을 픽션으로 제시하는 일에는 분명 윤리적 위험이 뒤따른다.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그 풍경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위험과 이를 시도하면서 수반되는, 극한의 상황에 극적 긴박감을 더하기 위한 학살의 풍경이 과연 윤리적으로 다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인류사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기 위한 재현의 당위성이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극단의 비인간적인 광기에 감동 코드가 버무려진 풍경이 비약으로 묘사되는 기존 영화에 비판적 성찰을 갖지 않기란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사울의 아들>은, 픽션으로서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끌고 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의가 있는 영화다. 영화는 단순히 “사실을 바탕으로” 희망과 사랑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비극과 참상을 효과적인 풍경으로 제시하는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료와 증언에 근거한 영화는 거의 다큐에 가깝도록 있던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 참극의 세밀한 부분을 제한된 시각으로 따라가며 다른 효과를 통해 비극적인 면을 극대화하고 재현의 윤리적 한계를 넘어서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 글은 영화 <사울의 아들>이 갖는 기존 영화와의 서사적 변별점과 영화에서 사용된 효과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의 윤리에 대해 사유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자료와 증언을 통한 재현으로서의 픽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존더코만도스(Sonderkomandos)―회색 지대의 인간, 혹은 비인간.



영화 <사울의 아들>은 ‘존더코만도스(Sonderkomandos)’라는, 이제껏 영화에서는 거의 다룬 적이 없는 존재를 출현시킨다. 존더코만도스는 아우슈비츠의 “특수 수용자 집단”을 일컫는 말로, 그들은 특수한 위치에 따라 “유대인을 화로 속에 몰아넣어야 했던” 유대인이었다.(프리모 레비는 저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회색지대”라는 단어를 써서 수용소 내의 특권층,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권력의 위계질서를 구축해 피해자 위에 군림하려 했던 포로들의 행위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 설명한다. 레비는 그 중 “존더코만도스Sonderkomandos”라는 “협력의 극단적인 예”인 존재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가스실로 보내야 할 새로 도착한 사람들(대게는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이에 질서를 부여했다. 가스실에서 시체들을 꺼내고, 턱에서 금니를 뽑고,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가지, 신발, 짐 가방의 내용물을 분류하며, 시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고, 화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하고, 재를 꺼내 없애야 했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p. 56-58. 인용 및 참고. ) 굳이 레비의 의견에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사울을 포함한 존더코만도스 대원이 처한 상황이 그 자체로 윤리를 넘어선 극단, 인간으로서 이해불가한 행위를 양산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으로 같은 인간의 신체를 고깃덩이처럼 다뤄야 하는 상황은 사람을 죽은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영화 속 인물의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 존더코만도스 대원들은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나체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옷가지를 뒤져 귀중품을 빼내고, 가스실에서의 모든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살아 있었던 인간이 “토막”이 되어 나오면 소각장으로 운반하고 시설을 재정비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에서 그들은 말이 없으며, 각자 맡은 일을 감정을 배제한 채 수행한다.


영화는 가스실에서의 대부분의 숏을 사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데 집중하지만, 사울의 행위와 표정은 또한 거기 있는 모든 대원의 표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모두는 “상한 얼굴, 지치고, 감정 없는”(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라 옮김, 만일, 2016, p. 37. 인용) 사울의 얼굴을 가진 채, 다가오는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대처하며 스스로 비인간임을 드러내 보인다. 죽은 시신이 망자가 아닌, 하나의 “토막”으로 환원되는 가스실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토막을 마주해야 하는 존더코만도스 대원과 그들의 수행을 두고, 그것이 과연 인간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p. 59.



한 대원의 실제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에 부과되는 모든 일반 상식이 배제된 채 시신에 가해지는 체계적인 처리 앞에서, 존더코만도스 대원들은 ‘토막’을 생산해 내는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부품이 되어, 사유를 포기한 채 스스로를 비인간화하여 그 모든 과정을 수행한다.


존더코만도스라는 이 비밀스러운 조직은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민낯을 가장 첨예하게 겪어야 했던 증인들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감독 라즐로 네메스는 2001년 『쇼아의 역사』라는 저널에서 발간된 「재에 묻힌 목소리」라는 특집호를 통해, 이들 “비밀 운반자”를 다루는데 단초가 되는 기록을 접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회색지대의 극단에 있었던 존재의 증언과 자료를 세심하게 쫓으며, ‘사울’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픽션’의 형식으로 재현의 숏을 만들어 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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