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즐로 네메스의 영화 <사울의 아들>에 관하여
사울의 기이한 행위―애도의 가능성
그런데 사울의 행위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는데, 그가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그 후에 시신을 빼돌리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감행하는 독단적인 행동은 동기가 명확하지 않아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사울의 행위를 통해 제기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의문은, ‘사울의 아들’이 진짜 사울 자신의 ‘아들’이 맞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단의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울이 목격한 ‘아들’의 죽음과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아들’이니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 간청하는 장면 사이의 간극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소년이 숨을 쉬고 살아 있음을 목격하고 사울은 당황스러움과 뒤이어 호기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가 소년을 안아 들기로 결심하는 데는 어떤 의지가 촉발되었다고 보이는데, 그 의지의 연원은 죽은 소년이 진짜 ‘나의’ 아들이라는 것, 그러기에 부모로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아야 한다는 것으로 여겨지기는 힘들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와 죽으러 들어가는 ‘물량’의 옷가지들을 뒤지며 어떤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외에도 그의 아들이 맞는지 추궁하는 동료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점 등을 근거로, 사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착하는 소년이 그의 진짜 아들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울의 ‘아들’, ‘소년’이라는 존재는 사울에게 무엇이었을까. 소년은 수많은 기계적인 죽음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하나의 예외, 가장 효과적인 학살에서 희박한 확률로 살아남은 미미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이 겪는 또 한 번의 죽음. 사울은 이 죽음을 목격한다.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마주하는 것이다. 사울은 변한다.(영화는 증언의 기록을 통해 존더코만도스 대원들 사이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들고 온다. 앞서 소개한 프리모 레비의 저작에는 실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특수부대는 매일같이 하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아주 예외적인, 전무후무한 경우였다. 아마 사람들의 몸이 그녀 주위로 장벽을 이루어 아직 숨 쉴 만한 한 줌의 공기를 가두어 두었던 모양이다. 부대원들은 당황했다. 죽음은 매순간 하는 그들의 일이었고, ‘첫날 미쳐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하는 얘기처럼 바로 그들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살아있었다. (......) 알코올과 일상적인 살육으로 인해 야수가 된 이 노예들은 이제 변했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p.63~64. 이 소녀의 죽음은 영화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소년을 앞에 두고 의사가 한 말이다. “지금껏 이런 건 한 번 봤어. 그때는 여자애였지.”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잠깐의 예외를 마주한 사울은 이미 죽어있던 상태에서 소년을 통해 생명의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살생이 ‘토막’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소년의 죽음이 망자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도록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을 느낀다. 그는 가족-유대인으로 함께 묶인 소년에게, 제대로 된 유대식 장례―“적절한 의식과 그에 따른 기도, 랍비, 경건한 매장”(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라 옮김, 만일, 2016, p. 53.인용)―를 치러 주기 위해 그의 모든 행동 노선을 굳힌다. 이를 통해, 사울을 향한 두 번째 의문, 그는 왜 이토록 독단적인 행동을 일삼는가, 라는 물음의 답은 자연스레 ‘애도’의 완수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인 행위로 귀결된다.
한 논문의 저자는 사울의 애도 행위는 단순히 ‘소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 전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울이 랍비를 찾아다니는 일에,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일을 통해 제시되는 장소에 주목한다. “같은 존더코만도 부대원인 첫 번째 랍비를 만나는 가스실, 두 번째 랍비를 찾으러 간 시체 소각장과 재를 버리는 강, 죽음을 무릅쓰고 세 번째 랍비를 찾으러 간 야외 구덩이” 이러한 장소들은 “무의미하게 생산되는 죽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곳들”이며, 사울이 랍비를 찾아다니는 일은 “이 죽음들에 대한 증언”, “이 죽음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한 순례”가 된다. 증언과 순례의 과정으로서의 사울의 동선은 자연스럽게 ‘소년’을 향한 애도에서 “죽음을 박탈당한 토막들”에 대한 애도로 확장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김수진, 「빛과의 조우」, 씨네포럼, 2017, 101-121, p. 109. 인용 및 재구성.)
이를 통해 촉발되는 또 다른 의문은, 애도의 완성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애도란 하나의 시적 행위이다. 제대로 애도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가능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애도의 모든 표면적, 결과적 완성은 성립될 수 없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사울은 그가 애도해야 하는 모든 대상이 집약된 존재, ‘소년’을 강에서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애도의 완전한 실패라고 볼 수는 없다. 영화의 말미에, 사울은 강을 건넌 다른 존더코만도스 대원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이미 죽어 있는” 존재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방법은 애도를 완수하는 것이라는 완고한 의지를 가진 사울은 실패하지만, 그는 자신의 애도 대상인 그 모든 희생자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키며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애도에 성공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죽음은 하나의 ‘토막’으로 양산되는 죽음이 아니라 망자의 자격을 획득하는 죽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