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즐로 네메스의 영화 <사울의 아들>에 관하여
화면과 소리, 영화의 윤리적 표현 방식
영화 <사울의 아들>은 1.37:1이라는 좁은 화면 비율, 과하게 클로즈업된 인물의 얼굴과 흐릿한 배경의 대비, 포커스 아웃으로 보이는 끔찍한 장면 등의 시각적인 효과로 시종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와 더불어 공포스러운 적막 가운데서 희생자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 불안한 카메라에 가중되는 혼돈의 소리,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로 전해지는 상황의 묘사 등의 청각적인 효과는 심리적 불안을 극도로 배가시킨다. 앞선 글에서 제시한 영화의 윤리, 정확히 말하면 재현으로서의 픽션의 윤리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이 참극을 효과적인 풍경(혹은 전경)으로 제시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될 만한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령, 어떤 평자는 “줄무늬 옷을 입은 포로의 모습이나 기차에 떼로 수송되어 오는 유대인들이 군중 쇼트”는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나오는 장면”이라고 설명한다.(이충직, 김지현, 「〈사울의 아들〉의 연출의도와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18, 227-239. p. 229.)
<사울의 아들>에서 위와 같은 장면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클리셰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어지러운 카메라 워킹과 주인공의 얼굴과 표정에의 과도한 집중으로, 마치 그곳에 없었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혹은 봐야만 하는 것)의 한계를 일부러 드러내고자 하는 듯 보인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즉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스런 기억, 수용된 자신의 육체를 넘어서지 못한 채 주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을 영육으로 겪어야만 했던 경험, 그것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의 한계를 형상화한 듯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몇몇 장면들, 가령, 시체가 쌓여 있는 모습을 흐릿하게 하여 실루엣만 보이게 한 것과, 시체 전체의 외양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장면 등을 연출한 감독의 의도가 가졌던 윤리는 우리에게 홀로코스트를 보는 좀 더 다른 시각, 달리 말하지면 우리가 그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숙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존더코만도스들이 ‘토막’이 된 시체를 옮기는 장면에서 우리가 관람할 수 있는 것은 손, 가슴, 머리카락 등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세부의 제시는 굉장히 섬뜩하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가 볼 때, 학살 전체의 풍경을 관조와 비약의 수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볼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참혹한 기억의 제한된 부분, 극도의 세밀함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그 영역에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얼마간 동참하게끔 하는 실험으로 만든다. 일련의 장면들은 확실히 피로하고 눈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우리가 이 광기의 제노사이드를 더 이상 인류의 비극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곳, 그 제한된 악몽의 기억에 대해 차라리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한 발 물러 선 감각을 느끼게끔 한다. 영화에서 스쳐가며 봤던 그 세부들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가며
1986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쓰고 1년이 지난 1987년, 프리모 레비는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책은 유작이 되었다. 그는 그의 나머지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객관을 잃지 않으려 애쓴 흔적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아우슈비츠의 증인이자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그의 저작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은 결코 완전한 객관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삶과 완전히 떨어뜨려 바라볼 수 없는 고통의 체험에서 글을 써 내려가야 했던 그는 놀랍게도 더욱 철저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객관을 견지하면서 수용소의 상황을 재현해 내고자 하는 글쓰기 방식을 체화한다. 그는 증언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는 냉철한 생존자였다.
체르노빌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의 기록으로만 채워진 저작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이 “체르노빌의 증인”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 그리고 지구와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 그들의 “일상적인 감정, 생각, 발언을 기록하고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밝힌다. 그녀는 피해자들의 일상을 “영혼의 일상”이라고 말한다. 증언을 통한 영혼의 목소리 수집. 그녀는 이를 통해 “증인”의 자격을 획득하고 독자로 하여 그 증언이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영화 <사울의 아들> 또한 픽션의 형식을 취하지만, “자료와 증언에 근거하지 않은 숏”, “기록에 기초하지 않은 숏”(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라 옮김, 만일, 2016, p. 11.)이 하나도 없는 영화이다. 동시에 감독은 경험의 목소리를 화면을 통해 재현한다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정보 부족과 제한에 기초한다. 누구도 많이 알거나 볼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스크린으로) 옮기겠는가?”라고 말한다(이충직, 김지현, 「〈사울의 아들〉의 연출의도와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18, 227-239. p. 231. 감독의 말 재인용.). 이는 그가 영화를 통해 구현한 장면의 윤리적 고민에 대한 증거가 되기 충분하다.
홀로코스트는 끔찍한 비극이다. 이제껏 우리가 많은 영화를 관람하며 이야기했던 것은 홀로코스트가 인류사의 끔찍한 비극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의 참상을, 그곳에 존재했고 그것을 보았던 사람들의 부분적이고 제한된, 그러나 진실한 기억을, 그 기억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해 본 적은 없었다. 영화라는 매체에는 분명 한계가 있고, 이 영화 <사울의 아들> 또한 모든 영화에 수반되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전의 어떠한 영화도 시도해본 적 없는, 홀로코스트라는 이 비극의 기억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가면서(동시에 제한하면서)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영화 속 사울은 감독이 창조한 픽션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는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 허무하게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거기 있었음을 목격한 증인이자 그들, 형체도 없이 사라진 개개인의 신체이고 영혼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기 있었고, 모든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었다고 무언으로 주장한다. 재 속에서, 소리없이, 그들은 외친다. 감독 라즐로 네메스는 우연히 존더코만도스에 관한 증언의 자료를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그 목소리를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재에 묻힌 그들의 목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