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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Aug 25. 2024

[방학숙제] 1984

조지오웰


책의 줄거리가 담겨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사람들은 대형(Big brother)의 사진이 벽마다 붙어있고 텔레스크린이라는 티비+감시카메라의 기능을 하는 장치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극단적인 사회주의적 디스토피아시대에 살고 있다. 주인공 윈스턴은 당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의 기록은 전부 수정하고 말살하며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세 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과거와 당이 만들어내는 과거는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반란의 시작으로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역사를 몰래 만들어내는 일.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한다.

 책에서는 이중사고라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사실이 맞다고 여기며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지우고 ‘사실이다’라고 굳게 믿는 기술이다. 이것을 가르친다. 더불어 당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수를 제한한다.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금지되고 개인 간의 사적인 대화주제는 엄격히 통제되고 사랑도 통제된다. 매일 텔레스크린에서 방영하는 ’2분간 증오‘라는 방송은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반란군을 다루며 대중들을 선동한다. 사람들은 2분 동안 단계적인 분노 끝에 열광적으로 당에 충성하는 상태가 된다. 심지어 의문을 품고 반란을 준비하는 윈스턴 역시 방송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면 자기도 모르게 증오에 동참하게 된다며 한탄하기도 한다. 당은 이런 방법들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 깊숙한 곳까지 정치력을 행사한다. 언어를 제한해 사고의 한계를 만들고 사랑과 성행위를 금지해 즐거움과 성적욕망을 2분간 증오라는 시스템으로 분노로 해소 - 당의 충성이라는 완벽한 결과로 이용한다.  


2+2=5

 윈스턴은 반란을 준비하며 몰래 연인도 만들어 노동자들의 지역에 숨어 들어가 자신의 신념을 고착화한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 때 그는 결정적인 순간. 반란동맹 회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던 금서 골드 스타인의 <<과두정치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읽던 도중 당에게 체포당해 감금과 고문을 당한다. 동료이자 반란 형제단의 회원인 줄 알았던 사상경찰 오브라이언에게 기나긴 시간 동안 끔찍한 고문과 세뇌를 당한다.

 오브라이언은 나치 같은 독재권력이 결국에 무너진 것은 반란의 씨앗. 즉 ‘마음’을 뿌리 뽑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을 자기네 편으로 돌려놓지 못한 채로 처형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당을 향한 분노의 상징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런 숱한 고문들 속에서도 윈스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2+2=5가 됩니까. 손가락이 네 개인건 분명하잖아요. 이에 고문관은 “자네는 최후의 인간이다. 우리가 그 후계자이지“라며 정신세계의 포스트휴먼을 자처한다. 그는 2+2가 5가 될 수도 3이 될 수도 있다며 나약한 인간집단의 신념을 지적하며 그런 신념의 변화를 이용하는 것이 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라 설명한다. 세상은 실재하지 않고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으며 당의 체계적이고 섬세한 세뇌로 그 세상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와 고문들 속에서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에게 존경심마저 느낀다. 우월한 지성에서 나오는 감탄과 그동안 당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낼 곳이 없었는데 드디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해방감에서 말이다.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그것이 자유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싸우게 된다. 당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면 된다. 물살을 거스르려 애쓸 필요 없다. 방향을 바꿔 흐름의 방향으로 몸을 돌리면 편하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선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다며 다짐한다. ’충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그들은 언젠가 아무런 예고 없이 총살을 할 것이다. 그래도 몇 초 전에는 알 수 있겠지. 그때 나는 당에 대한 모든 분노를 폭발시키고 죽는다. 그들을 증오하며 죽는 것 그것이 자유다.‘

 그러나 그는 고문들 속에서 자신의 손가락이 네 개에서 다섯 개로 보이는 기적을 경험한다. 자신이 보았던 세명의 독립운동가의 사진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당은 실제로 전쟁 중이며 골드스타인은 나쁜 놈이다. 이런 변화를 인정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석방시키며 질문한다. “대형에게 충성하는가?”, “네”  이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문장. ”아냐 그걸론 부족해. 너는 대형을 사랑해야 된다“


 정신교정을 마친 윈스턴은 다시 사회로 돌아와 공허 속에서 일상을 보낸다.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연인 줄리아마저 (본능적으로)배신해버리고 돌아온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이 실재하는지 알 수 없고 그저 값싼 진으로 하루를 달랜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쟁의 승전보를 울리던 날 그는 그토록 기다리던 갑작스러운 총살을 당하게 된다. 승전을 진심으로 기뻐하던 그의 마지막 생각 “대형을 사랑한다”. 증오하는 채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그의 마지막 자유마저 앗아가 버린 당의 철저한 계획이었다. 한 인간을 그토록 부숴버릴 수 있구나.

 

 역사적으로 인간사회는 세 개의 층으로 계급을 나눴다. 즉 권력자와 중간층 그리고 노동자로 이루어진 계층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현대 대한민국 역시 표면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자본주의의 체계대로 계층이 구분된다. 사실상 시스템을 역변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인 노동자는 너무나 지쳐있고 우매한 사람들이라 그런 의지조차 갖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서 봉건제를 거쳐 세상은 그 모습 그대로 현대 이데올로기 형태로 계승되었고 그렇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사회 최적의 효율을 갖는 형태라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상층계급을 증오하고 제도를 타파하지만 다음세대에서 다시 반복되는 계층제. 인간, 더 나아가 동물의 본성이지 않을까. 계층 간 이동이라는 희망은 노동자를 더욱 노동하게 만드는 연료 같은 것일지도.


 많은 사회학자들은 공산주의 체제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이념이라고 말한다. 통제를 통해 계층을 없애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권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말 그대로 이상적인,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논리에서 ‘인간의 본성’을 제외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태생적인 불안감 때문에 타인에 대한 지배욕구를 버릴 수 없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는 가짜전쟁이라는 장치로 시민들의 폭력성을 해소함과 동시에 개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평화를 유지한다. 또한 교육의 질을 저하하고 언어를 제한함으로 사람들의 사고가 너무 높은 수준까지 다다르지 않게 유지한다. 사람은 너무 많이 알면 불행해진다. 이것이 책에 계속 등장하는 당의 슬로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의 진짜 의미이다. 평화와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여기서 나는 인간 삶의 처절함을 느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끝없는 방황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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