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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an 16. 2023

할아버지들과의 인연

1984년 음력 9월 어느 날.

아버지와 첫째인 나를 임신한 어머니는 외할머니댁에서 외할아버지 제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제사 음식이란 것이 늘 그렇듯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대부분이라 이모네, 삼촌네, 우리 가족, 할머니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모여 준비를 서둘렀다. 간신히 오후 5시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잠깐 한숨 돌린 후 저녁 식사 시간.


“옴메!”


스멀스멀 올라오는 진통에 놀란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저녁 준비하던 외가 친척 가족들은 모두가 놀랐고 아버지는 허둥지둥 어머니를 거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버지와 이모가 어머니를 부축해 큰 병원으로 향했다. 몇 시간의 진통 끝에 늦은 밤.


“응애!!!”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외할아버지 제삿날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얼굴도 뵌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첫 번째 인연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렸을 적 내 생일 기억에는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나의 생일을 축하해 본 적이 없었다. 외할아버지 제사 준비가 우선이었고 어쩌다 생각난 친척들이 한마디 할 뿐이었다.


“오메! 그라고 본께. 오늘 누구 생일이제!”




1992년 늦여름 토요일.

친할아버지는 위암에 걸려 콜롬방 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병간호에 지친 아버지, 어머니는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개구쟁이였던 나는 동생과 함께 태어난 지 이제 한 달 된 강아지를 보러 옆집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 우리 동네에 있던 집들은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 사이에 있던 집이었고 대부분이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집처럼 생긴 2층 양옥집이었다.

친구네 집은 파란색 철제 대문 위에는 왕관처럼 생긴 작은 화단이 있었고 친구와 나는 겁도 없이 그 화단에 강아지를 데리고 올라갔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는 우리 뒤를 쫄래쫄래 쫓아다녔고 친구와 나는 철제 대문 위의 조그만 화단에서 강아지와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깔깔 거리며 강아지를 피해 도망치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안전바가 없는 화단 가장자리를 외줄 타는 것처럼 잽싸게 지나다녔다. 발이 빠졌다. 휘청했다.


퍽!!


순간 시간이 멈췄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는 바닥에서 올려보는 철제 대문과 새파란 하늘이 보였고 그 뒤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 시각 옆에서 놀던 내 동생은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엄마!! 성아(형아)가 떨어졌어!!!”


잠결에 놀란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둘러 집을 나섰고 바닥에 쓰러진 나를 데리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은 채 도착한 나 때문에 상황이 긴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흡이 돌아오지 않아 급하게 기관절개술을 시도했고 내 목에는 기도로 연결된 관이 삽입되었다.


다시 정신이 살짝 들었을 땐 아버지가 나를 안고 병원 계단에서 뛰고 있었다.


“어디로 가믄 되요!”


CT를 찍은 뒤 만난 의사는 부모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스르르 무너져 내렸고, 뒤이어 도착한 이모와 이모부가 넋이 나간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혼수상태인 나는 공중에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좀 살려줘.. 나 죽기 싫어”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의사 선상님. 내 아들 대학병원 응급실로 한 번만 보내주쇼. 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진료받아 볼라요.”


그날 구급차는 1시간 걸리는 광주 대학병원에 30분 만에 도착했고 대학병원 의사를 만난 아버지는 다시 한번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수술대에서 죽어도 괜찮으니까 수술 한 번만 해주쇼. 제발 수술 한 번만 하게 해주쇼”


수술대에 들어갔지만,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수술방에서 나온 나는 혼수상태 그대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보호자로 지정되어 수시로 나를 간호하러 드나드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중환자실 면회 시간만 기다렸고 한 달이 넘도록 괴로운 시간은 계속되었다.


시간은 흘러 12월.

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위암이 말기로 진행되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해졌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있는 게 의미가 없어졌기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시골집으로 모셨다. 할아버지를 시골집에 모셔다 드린 아버지는 가끔 안부차 시골집에 방문하셨고 내가 입원한 병원과 시골집을 번갈아 다니는 생활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골집에 방문한 아버지에게 친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재춘아.. 오늘은 여서 자고 가믄 안되겄냐?”

“안되라. 아버지 병원에 있는 아들한테도 가봐야되라.”

“그라냐? 그라제 아그한테 얼른 가봐야제”


그날 저녁 어머니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날 하얀 소복을 입고 있었고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하얀 눈에 덮여 있는 시골집에 갔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의 나는 기적처럼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시골에선 아침에 일어난 할머니가 움직임이 없는 할아버지가 이상해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전화했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제 밤에 느그 아버지 죽어브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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