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을 지키는 법 : 제도와 선택이 만드는 균형

16. 프랑스 건축 사무소의 야근을 줄이는 구조와 워라밸

by Jeonghoon KIM

한국에서 일할 때, 나는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남아서 다 했네.”
“열심히 한다.”


그런 말이 칭찬처럼 들리던 순간마다, 몸은 지쳐 있었고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루가 끝나면 얼마나 오래 남아 있었는지만 기억에 남았고, 그 시간이 정말 의미 있는지, 능력을 보여주는 기준이었는지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인턴을 하며, 나는 처음으로 그 기준이 흔들리는 순간을 맞았다.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퇴근하지 않는 대표를 따라 나도 당연히 자리에 남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표가 담담하게 물었다.

“왜 아직 남아 있어요?”

그 질문은 칭찬도 질책도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야근이 곧 성실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툴루즈의 사무실에서는 일이 남아 있어도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만 더 정리하고 퇴근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도 채 안 되는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야근이나 주말 근무는 거의 없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업무 구조와 제도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계약 구조와 마감 중심 관행이 맞물리면 잔업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기 쉽지만, 프랑스에서는 계약과 초과근무 보상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 업무 시간 안에서 책임과 결과 중심으로 프로젝트가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불필요한 잔업이 이어지는 환경은 크지 않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남아 있는 시간보다 맡은 책임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내가 일하는 사무소에서는 건축설계 실무자들이 각자의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지만, 규모가 커지거나 마감이 임박하면 자연스럽게 팀 단위로 전환된다. 대표가 모든 상황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료들끼리 먼저 가능 여부를 조율한 뒤 보고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점심시간 외에는 함께 커피를 마시며 길게 잡담을 나누는 시간도 거의 없다. 그만큼 모두가 정해진 시간 안에서 집중하며 움직인다. 시간은 효율적으로 쓰되, 일하는 방식에는 자율과 책임이 분명하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잔업 없이도 계획한 흐름 안에서 차분히 진행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파리에서 직원 수가 적을 때는 밤 10시, 11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자주 있었다. 그럼에도 오래 남았다는 이유로 특별한 의미는 부여되지 않았다. 필요하면 남고, 아니면 돌아간다.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 자리를 지키는 일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워라밸’이라는 말을 굳이 자주 꺼내지 않는다. 대신 정해진 시간 안에서 일하고, 그 이후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이미 익숙한 전제처럼 자리 잡고 있다. 퇴근은 특별한 결단이나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루의 무게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순간일 뿐이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일부 사무 환경에서는 오래 일하는 사람이 성실해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효율적으로 업무를 조율하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신뢰로 이어졌다.


덕분에 출근 전 업무 부담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날이 거의 없다. 불필요한 부담이 줄어드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늘어나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곳에서 일하며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

업무 시간이 길다고 해서 역량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퇴근 시간을 지키면서도 프로젝트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 경험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도가 느슨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개인의 선택만으로 이런 균형을 만들기는 어렵다. 아무리 스스로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잔업과 부담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은 제도와 개인의 선택이 함께 맞물릴 때 가능하다. 프랑스에서 경험한 것처럼, 명확한 제도 안에서 책임과 선택이 의미를 가지며, 그제야 야근을 최소화하고도 효율적인 업무와 삶의 균형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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