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건축설계 사무소, 부담 없는 회식의 기술

15. 자율과 배려로 만드는 부담 없는 인간적 접점

by Jeonghoon KIM

회식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왜인지 하루가 미리 길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지 않으면 눈치가 보이고, 가면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계산하게 되는 자리.
술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빠질 수 없다’는 전제가 늘 피곤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다.
혼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관계가 과해지는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성격이다. 그래서 회식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술이나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의 참석유무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툴루즈에서 내가 다니는 설계사무소는 회식을 자주 하지 않는다.
연말 크리스마스 회식과 여름 바캉스 전 모임 정도, 그리고 코로나 이전에는 두 달에 한 번쯤 원하는 사람들끼리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자리가 전부였다.
회식이 적다는 사실보다, 회식이 내 하루를 미리 점령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온다.


크리스마스 회식은 회사에서 주관하고, 대표도 함께한다.
프랑스는 카톨릭 문화권이라 크리스마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명절이다.
이날의 회식은 단순한 업무 연장이나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한 해를 함께 정리하고, “올해도 잘 버텼다”는 말을 조용히 나누는 문화적 행사에 가까웠다.


여름 회식은 대표 없이 직원들끼리만 모인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누군가는 접시를 나르고 누군가는 샐러드를 자른다.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 느슨한 준비 과정 자체가 이미 충분히 편안했다.
누구도 잘 참여하고 있는지, 분위기를 맞추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소소한 기념들이 있었다.
현상설계에 당첨되면 사무실에서 짧게 샴페인을 따고, 생일이 되면 당사자가 케이크나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오후 잠깐 축하를 받는다.
모두 일과 시간 안에서, 아주 짧게 이루어진다.
“끝나고 다 같이 모이자”는 말은 없다.
‘없음’ 덕분에, 누구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을 겪으며 나는 조금씩 깨달았다.
프랑스식 회식의 핵심은 분위기나 형식이 아니라, 선을 넘지 않겠다는 감각에 가깝다는 것을.


참여는 언제나 자유다.
원하면 오고, 원하지 않으면 빠진다.
그 선택에 대해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도 없다.
관계는 참석 여부로 증명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회식 날짜를 정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최소 두어 달 전에 공지하고, 여러 날짜 중 가능한 날을 고른다. 누군가 빠진다는 것을 서운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요하지 않고 분위기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삶의 속도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회식은
더 친해지기 위한 의무가 아니라,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잠깐 서로를 확인하는 장치가 된다.


한국의 회식 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점심 모임이 늘고, 음주 강요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식 앞에서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회식이 여전히 ‘선택’이 아니라 ‘확인’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경험하는 회식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기준을 만들어 주었다.
함께 일하는 사이라면 꼭 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는 가볍게 확인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회식은 친해지기 위해 애쓰는 자리가 아니라,
부담스럽지 않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간적 접점일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도, 그 정도의 거리감이라면 충분히 숨 쉴 수 있다.
그 정도의 온도라면 누구에게도 무리가 되지 않으면서, 관계는 오래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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