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재혁 Aug 26. 2019

호텔 레스토랑에 가는 이유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어?

 지난 7월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아내와 함께 신라호텔 23층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컨티넨탈'에서 결혼기념일 만찬을 가졌다.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8월 9일이지만, 어머니 찬스를 이용하기 위해 그날로 앞당겨 일정을 맞춘 것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갖는 둘만의 데이트가 주는 짜릿함에는, 채연이와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이 마치 청구서처럼 따라붙었다.




 레스토랑 방문 당일 오전에 예약 전화를 한 거라, 혹시 예약이 다 찼다는 매몰찬 대답이 돌아오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나 : 혹시 오늘 저녁에 예약이 가능할까요?

 남직원 : 그럼요, 고객님! 마침 예약이 취소된 테이블이 있어서, 창가 쪽으로 예약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상 나긋나긋한 직원의 살가운 응대에, 방문 전부터 이미 기분 좋아진 나였다.


아뮤즈 부쉬


 정성스러운 만듦새로 내 온 감각에 인사를 건네 오는 아뮤즈 부쉬를 시작으로, 'Chef's Tasting' 코스가 시작되었다.

 아뮤즈 부쉬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입(bouche)을 즐겁게 하는(amuse) 음식'이라는 뜻이다.
 고객이 메뉴판에서 골라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가 임의로 정해서 무료로 대접한다는 점에서 오르되브르(전채)와는 구별된다.
 아뮤즈 부쉬는 레스토랑에서 고객이 제일 처음 먹는 음식인 만큼 고객의 입맛을 돋우고 이어질 코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작은 음식일지라도 요리사의 철학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진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샴페인 볼랭져


 술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샴페인 볼랭져가 13만 원에 제공된다는 말에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랭져가 13만 원이라면, 백화점 와인 매장보다 싼 가격이다.
최근에 호텔 측에서 볼랭져를 대량 구입한 덕분에, 행사가로 판매 중이라고 했다.

 

 

 오븐에서 갓 나와 하나씩 제공되는 빵을 보니, 채연이 생각이 더 많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채연이에게 몰아줬어야 했을 빵을 각자 하나씩 뜯으면서도, 우리는 그 고소함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즐기진 못하였다.


여러 가지 질감의 토마토를 곁들인 바닷가재 마리네

 

씹지 않아도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바닷가재 마리네.


전복을 넣은 국내산 닭고기 무슬린과 인삼 풍미의 국내산 백봉오골계 벨루테

 

삼복 특선으로 나온 닭요리 역시, 맛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입안에서 순삭되었다.


고수와 아티초크 굴라쉬를 곁들인 부드럽게 익힌 농어

 

 샴페인 볼랭져와 특히 더 잘 어울렸던 농어 요리.


완두콩 아뇰로티와 블랙 트러플


 직원이 즉석에서 트러플을 갈아 올려준 완두콩 아뇰로티.


 아뇰로티 : 속을 채운 라비올리 류의 파스타

 

 완두콩으로 만든 이태리식 만두에다 귀하디 귀한 트러플을 올려 먹고 있자니, 내가 유럽 어느 나라의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된 기분이었고,


캐비아


뒤이어 나온 캐비아의 짭조름한 맛은 입이 누릴 수 있는 사치의 정점을 찍어주었다.


바닐라, 발사믹 글레이즈의 베리와 마카다미아를 곁들인 푸아그라 구이


 그리고 마침내, 내가 가장 고대해 마지않았던 푸아그라 구이 순서가 되었다.


 '너무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서빙하는 직원으로부터 들을 만큼, 티를 내며 맛있게 먹은 나였다.


오렌지 풍미의 엔다이브, 레디시 피클, 크리미 모렐과 스윗브레드를 곁들인 국내산 한우 등심 숯불구이


 푸아그라가 부드러운 식감과 황홀한 풍미로 꿈결 같은 감동을 안겼다면, 한우는 입에 착착 감기는 육질과 감칠맛으로 좀 더 현실감 있는 감흥을 그려냈다.


제철 과일 콘소메, 콤포트, 젤리, 셔벗 / 모던 애플 망고 / 미냐르디즈


 코스의 감동이 남긴 여운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나로선, 상큼 달콤한 디저트가 왠지 사족처럼 느껴졌더랬다. 물론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먹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호텔이라는 공간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휴가를 마음 놓고 내지 못하는 개원의 신분인 내게 호텔 스테이는 장거리 여행의 좋은 대안이 되어주었고, 최고의 맛과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호텔 레스토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해온 장소다.

 (한때는 호텔 티어 올리기에 재미 붙여서, SPG 골드 티어까지 달아본 경험도 있다. 결혼을 하고 애아빠가 되고나서부터는 여기저기 돈 들어갈 때가 많아지면서, 플래티늄까지 가보겠다는 욕심은 버렸지만 말이다.)


 사실, 1인당 25만 원( 거기다 10%의 봉사료까지 붙으면, 2인 한 끼 식사 요금이 55만 원에 이른다.)을 호가하는 'Chef's Tasting' 코스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신용카드 가입과 함께 취득한 호텔 멤버십에서 제공된 40만 원 상당의 금액권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아무리 결혼기념일 디너라고 해도) 이렇게 비싼 곳에서 저녁 먹을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3대 진미인 트러플·캐비아·푸아그라를 비롯하여 각 요리에 들어가는 최고급 재료들을 고려하면, 내가 이 레스토랑의 오너라도 인당 25만 원은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실제로 컨티넨탈은 워낙 최고급 재료와 식기를 쓰다 보니,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리 높은 수익을 올리지는 못한다고 한다.

 내 비록 국내 최고의 재벌이 운영하는 호텔 레스토랑의 수익률 걱정해줄 처지는 아니지만, 수익보다는 가치 실현을 더 우위에 두는 그들의 바람직한 경영 마인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호텔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성심성의껏 고객에게 최상의 가치를 전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호텔을 만나면, 내 돈으로 대가를 치르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값비싼 요금에 부합할 만큼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호텔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그리고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나를 그렇게까지 극진하게 대접해주는 곳을 이 도시 안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합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간이라도 빼줄 듯이 최고의 서비스로 열과 성을 다해 나를 모셔주는 곳이, 호텔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헉 소리 나는 요금을 치르면서도 내가 호텔에 가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자주는 못 간다.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공간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나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인으로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끝내 고객을 감동시키곤 하는 호텔리어들로부터 친절한 미소와 봉사하는 마음가짐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이 또한 내가 호텔에 가는 이유에 포함된다.


 그 외에도 호텔의 미덕은 무수히 많다. 비싸다는 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장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울 신라 호텔 23층 남자 화장실 뷰

 

 이를 테면,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이런 야경을 내려다보는 프리미엄 따위 말이다.


 아, 그리고 화장실은 공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479041?scode=032&OzSrank=1


매거진의 이전글 꿈으로 빚은 샴페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