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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혁 Mar 15. 2020

유리 개구리에게 배우다

에세이문학 2020.봄 [젊은작가 클릭클릭]에 실린 글

지난여름의 끝자락에, 나는 우리 집 두 여자와 함께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에 다녀온 바 있다. 사실, 그리 인상 깊게 다가온 전시회는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낮잠에서 덜 깬 딸아이를 안은 채 관람해야 했던 관계로 진득하게 감상할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다만 그 진귀한 피사체들을 담아내기 위해 렌즈 너머에서 고군분투했을 사진가들의 숨은 노고가 사진을 통해 느껴지면서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들긴 했다.

14kg짜리를 한 시간 가까이 안고 있느라 팔이 아픈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관람을 끝낼 생각에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오려던 내게 우리 딸, 채연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유리 개구리 한 번만 더 보고 가자!"

그래서 우리는 다시 유리 개구리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첫눈엔 그냥 슬쩍 지나쳤던 유리 개구리 사진을, 나는 채연이 덕분에 다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것이었다. 투명한 피부를 통해 배 속의 장기와 알까지 훤히 보이는 '유리 개구리'는 라임(rhyme)이 살아있는 예쁜 이름과는 달리, 아름다움보다는 징그러움 쪽에 더 가까운 비주얼을 지녔다. 그렇게 속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취약해 보이는 유리 개구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싫은 소리 한 번에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내 유리 멘탈이 꼭 저런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움찔하는 나였다.


   

그 당시의 나는 봄부터 써온 육아 에세이를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일념으로 총 서른한 곳의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카카오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연재해온 작품을 모아 다듬는 한편, 사진이 포함된 원고가 돋보일 수 있도록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편집도 새롭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장장 2주일에 걸쳐 출간제안서를 완성했을 당시만 해도, 나는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했다.

'한꺼번에 너무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면 어떻게 대응하지? 엄선해서 몇 군데만 투고할 걸 그랬나?'

'연락이 온다고 무조건 덥석 계약하지 않을 거야.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하자!'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멘탈은 거절 메일 한 통에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보내주신 원고는 잘 검토해보았습니다만,

저희와는 방향이 맞지 않아 출간은 어렵겠습니다.

귀한 원고 보내주셨는데 긍정적인 답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뜻 맞는 곳에서 좋은 책으로 출간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S출판사 논픽션팀 담당자가 실명으로 보내온 메일 끝에 붙은 선심성 문구처럼, 정말 뜻 맞는 곳에서 좋은 책으로 출간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예의를 갖출 만큼 갖춘 그 이메일에 나는 왜 그토록 심각한 치명상을 입었던 것일까?

사실 나는 그 이메일을 받기 전에 이미 두 통의 거절 메일을 받은 상태였다. 첫 거절 메일은 꽤 인지도 높은 M출판사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해당 출판사의 경우, 에세이 장르는 내부 기획을 통해 청탁된 원고만 출판한다는 방침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거절 메일을 보낸 Y출판사는 에세이 장르의 책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을 보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출판사는 인문학과 동아시아 관련 서적들만 출간하는 곳이었다. 앞서 받은 두 통의 거절 메일은 투고한 당일에 받은 것이었고 예외적인 상황이라 여겼기 때문에, 내 나름의 심리적 방어가 가능했다. 그런데 S출판사가 1주일간의 검토 기간을 거쳐서 보내온 세 번째 거절 메일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꺼번에 너무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면 어떻게 대응하지?'라는 같잖은 걱정을 하고 있던 나에게로 현실 자각의 쓰나미가 몰려오면서, 나는 곧 절망의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서른한 곳 모두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에 다녀온 후 며칠 내내, 유리 개구리의 잔상은 내 망막에 마치 번인(burn-in) 현상처럼 남아있었다. 그런데 내 관심의 화살이 제대로 꽂힌 유리 개구리에 대해 검색하던 중, 나는 그 유약한 생김새에 가려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투명한 몸을 가진 유리 개구리는 주변 환경과 잘 동화되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부가 훤히 드러나서 취약해 보이는 유리 피부는 오히려 천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어수단이자 생존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진화였던 셈이다. 그리고 부성애 강한 수컷 유리 개구리는 삼투압과 소변을 이용해 알을 촉촉하게 유지하면서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데, 알을 노리고 덤벼드는 말벌에게 뒷발 차기로 맞서는 용감함을 보이기도 한단다.

약해 보였던 유리 개구리의 투명 피부에 생존과 직결된 당위적 이유가 숨어 있듯, 예민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내 유리 멘탈에도 분명 존재 가치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세상사에 대한 감동과 분노의 역치가 매우 낮음과 동시에 내 안에서 피어나는 희로애락을 좀처럼 감추지 못하는 내 유리 멘탈 덕분에, 나의 글쓰기도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그 후로도 나는 '저희와는 방향이 맞지 않아 어쩌고저쩌고…'로 시작하는 거절 메일을 몇 통 더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처럼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가슴 쓰린 거절 메일에서도 긍정의 삼투압을 이용해 내가 취할 것만 취하고 절망의 불순물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는 스마트한 유리 멘탈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를 지속하는 한, 앞으로도 나는 숱한 거절의 경험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절의 공포와 아픔을 견디지 못해 글쓰기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을 것이다. 나의 글쓰기가 설혹 유리 개구리의 목숨 건 뒷발 차기만큼이나 무모한 일일지라도, 망가짐 없이 내 소중한 꿈을 지키며 뜨거운 열정을 발산하는 강화 유리 멘탈을 유지해갈 테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유리 개구리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이자 생존전략이다. 그리고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 의지가 선택한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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