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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혁 Mar 12. 2020

반지

에세이문학 2020.봄 [젊은작가 클릭클릭]에 실린 글

규칙적인 리듬으로 흘러가던 일상은 아주 사소한 엇박자로도 산산이 무너지고 만다. 그날 아침이 내겐 딱 그랬다. 아주 작은 물건이 없어졌을 뿐이었는데도 내가 받은 물심양면의 피해는 매우 컸다. 그 물건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지각했을 뿐만 아니라, 온종일 신경과민 상태로 보내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사소하지만은 않은 사건이었다. 없어진 물건이라는 게 다른 것도 아닌 결혼반지였으니 말이다. 내가 항상 퇴근 직후에 반지와 시계를 탈착해서 함께 놓아두는 곳은 책상 위였는데, 그날 아침엔 그 자리에 시계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응당 함께 있어야 할 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혼반지로 말할 것 같으면, 결혼식을 앞두고 한창 분주하고 예민해져 있던 우리 부부가 오랜 심사숙고 끝에 발품을 팔아 구입한 커플링이다. 그 당시에 최종적인 물망에 올랐던 후보는 티파니 사의 밀그레인과 다미아니 사의 디사이드라는 제품이었다. 두 제품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리는, 국내에서 밀그레인보다 덜 흔한 디사이드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자 모범적인 셀레브리티 커플의 전형이었던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커플과 똑같은 결혼반지를 갖고 싶다는 욕망 역시 우리의 선택에 힘을 실은 바 있다.

우리 부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반지가 사라져 버린 그 날, 나는 일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상실감을 경험했다. 그 반지를 구입할 당시의 여러 상황과 그 반지가 내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지난 4년 4개월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겨야 했다.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자꾸 뭔가가 새어나가는 것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로 하루를 근근이 보내고 퇴근한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반지 찾기에 나섰다. 책상 주변은 물론 침대, 소파, 책꽂이, TV 수납장 등의 밑을 스마트폰 플래시로 비춰보고, 눈에 띄는 모든 구석과 틈새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집안 어느 곳에서도 작고 반짝이는 그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집안 탐색에 지친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네 살배기 딸아이, 채연이에게로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채연아, 혹시 책상 위에 둔 아빠 반지 못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채연이가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번갈아 채연이를 추궁했다.

“채연이가 아빠 반지 어디다 숨겨 놓은 거 아니야? 제발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 그 반지는 정말 소중한 거란 말이야!”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심받아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을 짓던 채연이는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내게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빠가 이 책 읽고 있어. 아빠가 책 읽는 동안, 내가 한 번 찾아볼게.”

책을 받아든 나는 채연이의 지시대로 책을 읽으며, 곁눈질로 녀석의 동태를 살폈다. 잠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듯하던 채연이는 얼마 못 가 거실 한 편에 펼쳐둔 플레이모빌 세트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이미 아빠 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만의 놀이에 빠져든 채연이를 보며 무기력해져 버린 나는 그만 애먼 의심을 거두고 반지 찾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아빠 잠깐만!”

샤워나 하려고 욕실로 향하던 나를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채연이었다. 혹시 반지를 찾기라고 했나 싶어 뒤돌아보니, 채연이 손에 들려진 건 반지가 아니라 강아지 문양이 그려진 파란색 마스킹 테이프였다. 녀석은 그 마스킹 테이프를 내 왼손 약지에다 둘둘 감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반지 없어졌으니까, 내가 대신 반지를 만들어줄게!”

채연이가 내 왼손 약지에 감아놓고 간 마스킹 테이프를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없이 터져 나온 그 헛웃음은 이내 흐뭇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날 내가 처음으로 지은 미소였다는 걸 깨달았다. 집안에서 물건이 없어질 때마다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이 억울할 법도 한데, 그렇게 귀여운 생각을 해낸 채연이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내 소중한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지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마치 헛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내 주변 곳곳을 두리번거리곤 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결혼반지를 되찾고 싶은 열망을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설혹 그 반지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지금 내게 반지는 없지만, 강아지 문양 마스킹 테이프로 반지를 만들어주면서 끝내 날 웃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딸, 채연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와 함께 많은 순간의 기억을 공유해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갈 아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내 왼손 약지에는 우리 집 두 여자를 향한 사랑으로 주조된 투명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반지는 아무리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은 채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마법을 지닌 절대 반지다.

그 절대 반지로 말할 것 같으면,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의 세기적 결합을 고작 5년밖에 유지시키지 못한 다미아니 디사이드 반지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내 사랑을 지켜줄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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