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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Oct 25. 2023

한국바둑의 도약과 사천왕: "잡초바둑" 서봉수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2

조훈현이 1970년 말에서 1980년대 중반에 걸쳐 한국바둑을 석권할 당시 그를 앞을 막는 기사로는 서봉수가 유일하였다. 한국바둑의 절대강자의 계보는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의 순으로 이어져 왔는데, 조훈현과 하찬석의 대전은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하찬석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개의 타이틀은 1, 2년 사이에 모두 조훈현에게 빼앗겼고, 하찬석은 절치부심 다시 도전자가 되어 재기를 노렸으나 그 꿈은 조훈현에 의해 다시 무참히 짓밟혔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1980년대 초 무렵, 조훈현과 하찬석 간의 15번기가 이루어졌다. 조훈현이 가진 몇 개의 타이틀전에서 하찬석이 도전자로 등장하여, 그 도전기를 모두 합하면 대국이 15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합에서 하찬석은 처참히 패배한다.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밀린 대국이 있는가 하면, 초중반까지는 압도적으로 유리하여 도저히 질래야 질 수 없는 바둑도 결국은 허무하게 역전패당하는 것이었다. 연패가 계속되자 결국 하찬석은 이 도전기를 모두 계속하지 못하고, 중간에 시합을 포기하고 그 길로 고향인 합천 해인사로 낙향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하찬석은 한국 기계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물며 당대 최고의 기사라던 하찬석이 이러했을 진데, 다른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훈현은 거의 불패의 강자로서 한국바둑을 석권했던 것이다. 그런 조훈현을 막아서는 유일한 기사가 바로 서봉수였다. 성장과정에서 보자면 조훈현과 서봉수는 극과 극이라 할 만큼 대비되는 기사이다. 조훈현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고, 일본유학을 통해 세고에 문하에서 정통 바둑수업을 받았다. 말하자면 조훈현은 바둑에 있어서는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에 비하면 서봉수는 스승도 없이 오직 독학과 내기바둑을 통해 바둑을 독학하면서 성장해 왔다. 체계적인 바둑 수업 없이 독학을 통해 프로기사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아마추어 바둑 강자들이 있었다. 바둑 두는 시간이나 열정으로 따지면 이들은 결코 프로기사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하위 정도의 프로기사와 대등한 승부를 가져갈 수 있는 아마추어 기사는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독학으로 한국바둑의 정상권에 오르고, 나중에 응창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서봉수는 조훈현 이상의 천재적 기재(棋才)를 소유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바둑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중국의 유명한 바둑책으로서 우리 서점에 가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현기경>조차도 알지 못하였고, 나중에 입단한 후에야 “이런 좋은 책이 있는 줄 몰랐네”하고 탄식했다는 정도였다.


서봉수는 입단 후 초단시절 대국수 조남철이 보유한 제4기 명인전의 도전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9단보다 강한 초단이 수두룩하지만, 당시에는 단에 대한 권위가 매우 높았다. 초단이 도전자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이 놀랄 일이었다. 도전기는 서봉수가 2단으로 승단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이 도전기에서 서봉수는 조남철 8단을 물리치고 명인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이어 그는 명인 위를 내리 5 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서봉수를 “명인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서 명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서봉수의 독특한 이력으로 그에게는 많은 별명이 붙어있다. 그때까지 국내정상 기사들이 모두 일본유학파였던데 비해 서봉수는 순수 국내파였기 때문에 “토종바둑”, “된장바둑”이라고 불렸다. 또 정통 엘리트 바둑교육이 아니라 실전을 통해 단련된 바둑이었기 때문에 그의 바둑은 매우 실전적이었고, 그래서 그를 “잡초바둑”, “야전사령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전쟁에서 야전은 교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현장의 수많은 요소와 병사나 지휘관들의 심리상태, 기세 등에 따라 승패가 갈려진다. 나는 서봉수가 가진 많은 별명 가운데 "잡초 바둑"이란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잡초 바둑"이라는 별명에는 정식으로 전문기사의 수업을 받지 못하고 실전을 통해 바둑을 익혔다는 의미도 있지만 수없이 밟히고 밟히고도 다시 일어서는 불멸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없이 밟히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도전해왔다. 그의 그런 정신은 나이 7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잡초바둑 서봉수의 진면목이 단적으로 드러난 대국이 1992년 제2회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 결승 제5국이다. 5판 3승제 결승에서 두 기사는 이미 2:2의 팽팽한 균형을 이룩한 상태였고, 최종국인 이번 제5국에서 우승자가 결정된다. 상대는 미학(美學)이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의 오다케 9단. 그는 바둑의 행마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기사로서 실전형인 서봉수와는 기풍상이나 바둑을 대하는 자세가 거의 극과 극이다. 오다케가 얼마만큼 바둑에서의 미(美)를 강조하는가 하면, “설사 바둑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양이 나쁜 수는 두지 않는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 대국에서 오다케는 중반까지 필승의 형세를 확보한다. 그의 행마는 유려(流麗)하였고, 두는 수마다 찬사를 받았다. 


최근 인공지능의 분석에 따르면 이때 오다케가 둔 수 대부분이 인공지능이 예측한 수와 일치하였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분석에 따르면 중반전이 끝날 무렵 오다케 승리확률 98%. 이것은 역전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봉수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드디어 오다케는 삐끗 한수 실수를 하고 만다. 그렇지만 실수가 있었더라도 여전히 오다케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그렇지만 오다케 9단은 이후 패닉에 빠져 스스로 무너져 내리며, 결국 그 바둑을 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서봉수는 조훈현에 이어 제2회 응창기배를 다시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서봉수가 조훈현의 독주를 막는다고는 하지만, 서봉수 역시 조훈현에게 거의 1:2 정도의 승률밖에 기록하지 못하였다. 만약 타이틀전이 단판 승부라면 서봉수가 조훈현의 절반 정도의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타이틀전은 대개 7번 승부, 5번 승부, 적더라도 3번 승부이다. 1:2의 승률로서 이러한 번기 승부에서 타이틀을 획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서봉수는 비록 일방적으로 몰리면서도 끝없는 도전을 통해 오직 그만이 조훈현 왕국을 한 틈에서 허물곤 했다.


서봉수는 아직 그 누구도 넘지 못한 불멸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바로 1997년에 개최된 <제5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의 9연승 기록이다. 이 대회는 지금도 매년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는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의 전신으로서, 한, 중, 일에서 각각 5명의 대표선수가 출전하여 이기는 선수는 계속 대국을 이어가는 승발전 방식이다. 이 대전방식은 불리한 상태에서도 한 선수의 연승으로 순식간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데 매력이 있다. 이론상으로는 한 명의 선수가 다른 두 나라 선수 10명 모두를 꺾을 수도 있다. 


이 시합에서 중국의 선봉장으로 나온 위빈 9단은 한국의 선봉 김영환을 꺾은 뒤, 일본의 선봉장 이와지 슈조(三) 9단마저 꺾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선수가 한국의 2장 서봉수 9단이었다. 서봉수 9단은 일본의 이와지 슈조를 꺾은 것을 시작으로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그때부터 서봉수는 중국과 일본의 강자를 하나하나 꺾어나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4명의 일본대표 선수와 5명의 중국대표 선수를 남김없이 모조리 꺾어버린 것이었다.  9판의 승리 가운데 3판은 반집승이었다. 그만큼 서봉수는 처절히 싸웠던 것이었다. 이러한 서봉수의 분전 덕택에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는 바둑 한 판 두지 않고 우승상금을 나눠갖게 되었다.   


일본의 히코사카와의 대국은 정말 거짓말 같은 승리였다. 바둑은 이제 다 끝나고 한 집짜리 끝내기 하나만 남았다. 그 한 집짜리 끝내기를 두는 것으로 히코사카의 반집승은 확정된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히코사카가 한 집짜리 수를 두지 않고 공배를 메운 것이었다. 그러자 서봉수가 얼른 이곳을 둠으로써 거꾸로 반 집 승을 거둔 것이다. 아마 프로 바둑에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진귀한 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도 농심신라면배 바둑은 매년 개최되고 있지만, 아마 서봉수의 9연승 기록을 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서봉수는 프로기사로서 대단한 자부심과 고집이 있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990년대 어느 정치인이 한국기원 총재 자리에 취임하였다. 그 분은 바둑을 아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 가운데는 자신이 바둑이 제일 세다고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총재실로 출근하는 날에는 프로기사들을 불러 바둑을 즐겼다. 그런데 서봉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한국기원 총재라고 하지만, 아마추어라면 프로를 존중해야 하는데, 그냥 아랫사람 부리듯이 프로기사를 불러 지도료도 주지 않고 그냥 바둑을 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총재 분은 서봉수를 불렀다. 한국기원 총재가 부르는데 아무리 천하의 서봉수라 할 지라고 가지 않을 수 없어 총재실로 갔다. 총재는 자신의 실력을 믿고 서봉수에게 선으로 두겠다고 하며 바둑돌을 집었다. 그 대국에서 서봉수는 바둑판 위에 살아있는 돌이 하나도 없도록 총재의 말을 몽땅 다 잡아버렸다고 한다. 물론 그 총재 분도 상당한 실력자라 처음부터 적게 질 요량으로 바둑을 두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이길려고 두다가 대마가 잡히게 되고, 대마가 하나씩 잡히면서 흥분하여 덤비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이후에 그 분은 서봉수를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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