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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May 04. 2024

영화: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일제 지배하의 만주의 광산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

■ 개요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던 소설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조건”이었다. 만화가게 등 책 대본소에 가면 어디를 가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비치해두지 않았던 집이 없을 정도였다. 서점에 가면 서가에서도 이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떤 소설인지 호기심이 일면서도 읽어보지는 못했다. 


소설 “인간의 조건”은 고미가와 쥰페이(五味川純平)가 1956-58년에 걸쳐 쓴 소설로서, 작가가 만주의 쇼와제강소(昭和製鋼所)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썼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1,300만 부 이상이 팔린 대 베스트셀러가 되어 고미가와는 일약 유명 작가로 등장하였다. 소설 인간의 조건은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는 3부작으로 제작되었다. 각 각의 부는 상영시간이 평균 3시간 10분으로서, 세 작품을 합하면 모두 10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이 영화는 가장 긴 상업용 영화로서 기네스 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오늘 소개하는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은 삼부작 중 첫 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 소설의 제1부와 제2부의 내용을 영화화하여 1959년에 제작되었다. 후속편도 연이어 제작되었는데, 몇몇 영화관에서는 올 나이트 상영으로 세 편을 한꺼번에 보여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의 무대는 만주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촬영하던 때에는 일본과 중국이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촬영팀이 만주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 촬영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 줄거리


때는 1943년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일본이 중국 국토의 태반을 점령한 가운데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국내에서는 병사들을 징집하기 위한 소집영장이 젊은이들에게 속속 도달하고 있었다. 


만주철도 조사부에서 근무하는 26세의 젊은 사원 카지(梶)도 언제 자신에게 소집영장이 날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친구 카게야마(影山)가 카지에게 만주의 광산에 가서 근무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해온다. 그곳으로 가면 군대 소집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카지는 그 제안을 승낙하고 아내 미치코(美千子)와 함께 만주로 간다.  

카지에게 그런 제안이 온 것은 카지가 노무관리에 관하여 좋은 보고서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닦달하며 휘몰아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노동조건을 개선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는데, 이것이 상사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 상사들은 카지의 보고서를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카지가 노동자 친화적인 노무관리를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하니까 자신 있으면 한 번 해보라는 것이었고, 실제 그 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카지의 부임처는 만주의 노호령(老虎嶺)에 있는 광산이었다. 카지는 아내 미치코와 함께 트럭 뒷칸에 올라 먼지를 덮어쓰면서 노호령으로 향한다. 그가 부임한 광산에는 약 1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노동자이지 그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노동조건은 극히 열악하여 노동자들에게 식량도 변변히 제공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채찍을 맞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중간관리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을 중간에 가로채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식량도 빼돌리고 있다. 광산 소장은 이러한 중간 관리자들의 부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생산목표 달성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모른 채 하고 있다.  


카지는 이곳에서 오키시마(沖島)라는 중간관리자와 친하게 된다. 오키시마는 다른 관리자와 같이 부정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동자들에게 매질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오키시마였지만, 노동자에 호의적인 카지와 마음이 통하게 되면서 카지의 편에 서서 싸운다. 카지의 부하인 중국인 청년인 진(陳)도 카지의 태도에 감동하여 열심히 그를 도운다. 

카지는 중간관리자들의 부정의 실태를 알게 되어 이를 광산소장에게 보고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렇지만 소장은 광산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카지는 부정을 저지르는 중간관리자들 앞에서 그들의 부정을 지적하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력한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중간관리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할 테면 해보라고 버틴다. 이렇게 카지와 부패한 중간관리자들이 대립하고 있을 때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다. 


헌병대에서 광산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중국인 전쟁 포로를 광산으로 보내겠다고 하며 대신 포로를 감시할 책임은 전적으로 광산에게 있다고 한다. 소장은 자신들은 포로를 관리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이유가 헌병대에 통할 리가 없다. 헌병대장은 소장의 말을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포로를 보내겠다고 한다. 


포로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였다. 화물칸 문을 열었는데도 포로들이 내려오지 않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카지가 화물칸에 오르니 포로들은 거의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몇 날 며칠 이곳으로 짐짝같이 실려오면서 쌀 한 톨,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병들고 지쳐 움직일 수가 없었고, 이미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포로들은 광산 옆에 있는 수용소에 수용되고, 수용소는 3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런데 포로들은 자신들은 포로가 아니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와서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학살하고, 남은 사람들은 전쟁포로라고 하면서 끌고 왔다는 것이었다. 

카지의 노력으로 노동자들의 상황은 아주 조금은 나아지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생산량도 조금 늘어나고 있다. 이때 상부에서 생산량을 20% 늘리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할당량에 맞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악덕 중간관리자들은 노동자를 더 몰아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카지는 그럴 경우 더 역효과만 난다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대우를 좋게 하여 스스로 노동을 할 의욕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장은 노동의욕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자가 최고라고 하면서 포로들에게 여자를 제공하라고 한다. 이곳에는 중국인 여자들로 이루어진 위안소가 있는데, 그곳도 카지가 관리 하에 있다. 카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소장의 명령으로 할 수 없이 위안소를 찾아가 그곳의 리더 격인 김동복(金東福)에게 협조를 부탁한다. 김동복도 카지의 부탁을 들어 여자들을 포로들이 있는 수용소로 보낸다. 포로인 고(高)와 위안부인 장춘란(楊春蘭)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한편 부패 중간관리자인 조선인 장명찬은 김동복과 짜고 포로를 탈출시킬 음모를 꾸민다. 그들이 포로를 탈출시키려는 것은 탈출한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겨 큰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일본인 중간관리자 무타(牟田)와 후루야(古屋)도 가담하고 있다. 김복동은 미인계를 써서 진을 회유한다. 진의 친구가 변전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진으로 하여금 변전소에 가서 잠깐 동안 전기를 끊어달라는 것이었다. 

카지는 일반 노동자들 및 포로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에게 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최고의 대우를 해주려고 하였고, 이 정책이 효과가 있어 상부에서 지시한 20% 증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목표가 달성되어 광산 소장이하 중간 관리자들은 성대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포로 가운데 일부가 탈출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헌병대는 소장을 크게 질책하고, 특히 포로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였던 카지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그러나 장명찬 일당은 다시 포로 탈출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진에게 다시 전기를 끊으라고 협박하는데, 진은 결국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3천 볼트 철조망에 뛰어들어 사망한다.  


현장감독인 오카자키(岡崎)의 포로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는 포로들의 반감을 사 마침내 고를 비롯한 7인의 포로가 강력히 들고  왔다. 이 소식은 곧바로 헌병대에 알려져 헌병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광산으로 온다. 그리고는 고를 비롯한 7인을 잡아 현장에서 처형하겠다고 한다. 큰 구덩이를 판 후 7인을 그 앞에다 꿇어 앉히고는 부하들을 시켜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부하 헌병은 좋아라고 하며 나와 한 명의 목을 베고는 몸뚱이를 구덩이에 차 넣어 버린다. 다음 또 한 명이 목이 잘려 죽었다. 다음은 고의 차례이다. 이 모습을 본 카지의 마음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고의 목의 잘리는 것을 보고는 카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둬!”라고 소리 지른다. 처형은 잠시 중지되고, 이 소리를 들은 헌병대장은 분기에 찬 눈으로 카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이때 포로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포로들은 목소리를 모아 처형을 중지하라고 소리 지른다. 이렇게 모든 포로가 처형을 중지하라고 들고일어나자 헌병대장도 어쩔 수 없이 처형을 중지하고 돌아간다. 


곧바로 카지는 헌병대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카지는 모진 고문을 당한다. 헌병들은 카지가 군부의 반항하였다고 하여 린치를 가한다. 며칠이 지나 카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석방되어 마중 나온 미치요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그들이 집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면 명령과 소집영장이었다. 


■ 약간의 감상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은 작가인 고미가와가 만주의 현장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횡포와 탄압받는 중국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가 이러한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의미도 된다. 그는 군국주의가 중국인들은 물론 자국민에게까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는지 고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이 작품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기반성이라 할 수도 있다. 최근에 오면서 자기반성을 잊어가는 많은 일본인들을 보면 딱한 마음이 든다. 

이 영화 중에서 광산 중간관리자인 조선인 장명찬이 악당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중국인 포로를 탈출시켜 노예로 팔아 돈을 벌려고 하고 있다. 카지가 장명찬을 만나 왜 이런 일을 하며,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러자 장명찬은 자신과 같은 조선인은 일본인들에게 핍박받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서는 중국인들로부터도 차별을 받고 있는데, 돈을 벌기 위해 포로들을 팔아넘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여러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카지는 일본인들 가운데서는 아주 드물게 중국인들을 인간답게 대접해주려 한다. 그렇지만 그를 보는 중국인들의 눈길은 차갑다. 위안부로서 고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장춘란은 고가 참수형으로 죽자 위로하는 카지를 향해 네가 더 나쁜 놈이라고 소리친다. 중국인들을 잘 대해주는 듯 말은 번듯히 하지만, 막상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무것도 못하는 카지가 더 밉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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