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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23. 2024

아듀 알랭 들롱, 아듀 프랑스 영화

필자가 고교와 대학에 다녔던 1970년대까지는 프랑스 영화가 꽤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특히 여대생들의 경우 뭔가 좀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야 했다.   


1960~70년대에 걸쳐 세계 영화계를 풍미하였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이 며칠 전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망은 프랑스 영화의 한 시대, 아니 세계 영화의 한 시대에 쉼표를 찍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데뷔하여 201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나,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알랭 들롱을 한 마디로 표현하려면 “미남 배우”이다. 그는 1960~70년대 그는 미남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랭 들롱이라는 이름을 미남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글썽이는 눈물을 보고는 많은 여성팬들은 그에게 매료되었다. 여성들만이 아니다. 트렌치 코트를 걸친 우수에 찬 그의 모습은 ‘사나이들’의 로망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외국영화들은 대개 일본을 경유하여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알랭 들롱을 일본식 발음인 ‘아랑 드롱’으로 불렸다. 그 시대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를 많이 감상하였던 필자도 ‘알랭 들롱’보다는 역시 ‘아랑 드롱’이라 해야 옛 감정이 살아난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녔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온 알랭 들롱의 출연작을 많이 감상하였다. 물론 그때 감상하였던 영화를 50년도 넘게 지난 지금 모두 기억할 수는 없다. 은퇴를 한 후 다시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그 시대의 영화를 다시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영화들을 감상하면 젊은 날의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알랭 들롱은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통해 일약 세계적 스타로 등장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출연작에서 주연배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어떤 면에서는 아주 독특한 배우이다. 대부분의 세계적 톱스타들은 영화에서 거의 좋은 사람,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의 역할로 등장한다. 특히 미남 배우의 경우는 거의가 그렇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알랭 들롱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악당도 아니다. 대개는 조무래기 소악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경찰에 체포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영화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비평할 입장은 못된다. 다만 극히 평범한 보통의 영화 팬의 입장에서 알랭 들롱의 사망에 즈음하여 이전에 즐겨 감상하였던 그가 출연작들을 기억해 내면서 영화 속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로 한다. 


알랭 들롱은 영화 속에서 대부분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는 천성적인 악당은 아니다. 대개는 악의 유혹에 번민하다고 결국은 악의 길로 들어서고, 결국 파멸의 길로 치닫는다. 그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은 가득히”에서부터 바로 그런 모습이 보인다. 부자 친구로부터의 계속되는 모욕에 참을 수 없어 그는 결국은 친구를 죽인 후 친구의 행세를 하면서 친구의 부와 애인까지 가로챈다. 그러나 그는 악인으로서 치밀하지 못하다. 결국은 친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그는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알랭 들롱은 항상 악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하다가 결국은 범죄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볼 때는 항상 조마조마하다. “안돼! 제발 그러지 마!” 속으로 소리치지만 그는 결국 악의 길, 범죄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그는 교도소 출소 후 범죄의 세계와 손을 끊으려 하지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자 결국은 보석 강도의 길로 들어선다.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는 교도소 출소 후 바르게 살려 하지만, 형사의 의심과 가혹한 핍박에 참지 못해 결국 형사를 죽이고 만다. 


알랭 들롱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치밀하지는 못하다. 범죄가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범죄가 일단은 성공하더라도 결국은 경찰의 추격에 죽거나 체포되고 만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는 장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찰에게 꼬리를 밟히고, 마지막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탈출하려 하지만, 결국은 경찰의 집중적인 총알세례를 받는다. “아듀 라미”에서도 금고털이에 성공을 하지만 경찰의 추적에 결국은 체포되고 만다.  


알랭 들롱이 꽃미남 배우라면 그 대각선 상에는 터프 가이 찰스 브론슨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콤비가 뜻밖에 잘 어울린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수입된 “아듀 라미”(친구여 안녕)는 대히트를 쳤다. 우연히 만난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은 금고털이를 계획하고, 만약 누가 체포되더라도 서로를 절대로 밀고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범행 후 결국 알랭 들롱이 체포되는데, 그는 경찰에 잡혀가면서도 끝까지 찰스 브론슨을 밀고하지 않는다.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끌려가며, 고개를 돌려 찰스 브론슨을 쳐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고인 눈물은 정말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찰스 브론슨은 무료한 시간에는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 위하여 물이 가득 찬 컵에 동전을 떨어트린다. 표면장력으로 볼록해진 물이 동전을 떨어뜨려도 물이 넘쳐흐르지 않으면 운이 좋다는 거다. 이 장면을 보고 한때 젊은이들은 다방에만 가면 컵에 물을 채우고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한 번도 물을 넘치게 한 적이 없던 찰스 브론슨이었지만, 알랭 들롱이 체포되면서 처음으로 컵에 물이 넘친다. 


“레드 선”에서도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은 다시 만난다. 둘은 친구 사이로 함께 갱단의 우두머리인데, 알랭 들롱은 악독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둘은 부하들을 이끌고 초대 주미 일본대사가 부임하는 열차를 습격하여 일본 천황이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하는 명검을 강탈한다. 호위무사인 일본 사무라이에게 붙잡힌 찰스 브론슨은 사무라이와 힘을 합해 명검을 찾으러 나선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태생적인 잔악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준다. 


알랭 들롱과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인기배우였던 장 폴 벨몽도 역시 미남 배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 역시 알랭 들롱과는 묘하게 잘 어울린다. “볼사리노”에서 교도소에서 출옥한 알랭 들롱은 옛 애인의 새 남자인 장 폴 벨몽도와 의기투합한다. 그리고 마르사이유 항구 부근에서 생선 노점 아줌마들로부터 자릿세를 뜯는 것으로부터 범죄세계에 뛰어들어 결국 마르세이유의 암흑가를 제패하는 거물로 성장한다. 필자는 얼마 전 마르세이유 여행을 가서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자릿세를 뜯던 생선 노점시장을 구경하면서,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알랭 들롱의 영화에서는 대개 여주인공의 비중이 낮다. 알랭 들롱은 그의 잘생긴 얼굴과 어울리게 영화 속에서도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눈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의 그의 사랑은 죽고 못 사는 그런 열렬한 사랑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같은 미남배우인 톰 크루즈와 대비가 된다. 알랭 들롱은 그저 스쳐 가듯이 가는 사랑, 충동에 의한 불륜이 대부분이다. 


“스콜피오”에서는 오랫동안 함께 하였던 애인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이중 스파이란 사실을 알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 죽인다. “태양은 외로워”에서는 주식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과 며칠간 사랑을 나눈 후 아무 일 없는 듯 헤어진다. 영화 속의 그의 사랑은 이렇게 깊은 교감이 없는 건조한 사랑이다. “시실리안”에서는 시실리아 출신의 장 가뱅의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납치해 막대한 양의 보석을 강탈하는 데 성공하지만, 장 가뱅의 며느리와의 불륜이 들통나 결국 장 가뱅의 총에 맞아 죽는다.   


알랭 들롱의 영화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작품이 <암흑가의 두 사람>이다. 교도소 수감자들을 교화시키는 일을 하는 장 가뱅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알랭 들롱은 가석방된다. 그는 장 가뱅의 가르침을 받아 이제 착하게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잡아넣은 형사는 알랭 들롱이 보통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형사는 끊임없이 알랭 들롱을 의심하고 자극하여 오히려 범죄를 유도한다.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한 알랭 들롱은 형사를 죽이고, 기요틴에 자신의 목을 집어넣는다. 


그러나 알랭 드롱이 모든 영화에서 반드시 범죄자로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약을 다룬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서 그는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 나와 뜨거운 애국심과 용기로 나치 독일과 싸워나가 마침내 프랑스의 자유를 쟁취한다. 많은 프랑스의 톱스타들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출연한 이 영화는 프랑스의 국뽕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제일 감명 깊었던 장면은 나치가 파리에서 퇴각할 무렵, 시가전이 진행되는 속에서도 레지스탕스의 지도자 한 사람이 한 여성과 함께 파리 경찰청을 찾아온다. 파리 경찰청장을 만나 “지금부터 이 경찰청을 우리가 접수합니다.”라 하자, 경찰청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경례를 올리면서 “모든 지휘권을 넘깁니다.” 하면서 일체의 권한을 레지스탕스에게 넘긴다. 해방 후의 친일파 경찰 잔당들이 득세를 하였던 우리와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장면이었다. 국뽕 영화를 만들더라도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에어포트 79”에서는 알랭 들롱이 콩코드 기의 기장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콩코드 기 운항 중 미사일 공격을 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승객을 보호하는 불굴의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스튜어디스로 역을 맡았던 당대의 섹스 심벌 실비아 크리스텔과 연인관계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랭 들롱, 장 가뱅, 장 폴 벨몽도 등이 활약하던 그 시대 프랑스 영화에는 나의 젊음 시절의 기억이 숨어있다. 우울이라고도 우수라고도 표현하기 어려운 그 독특한 분위기에 끌려 프랑스 영화를 찾았다. 최근에 몇 편의 프랑스 영화를 감상하였지만,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의 아류로 전락한 느낌이다. 이렇게 프랑스 영화의 시대도 가고, 그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알랭 들롱도 갔다. 그의 명복을 빈다. 

아듀! 알랭 들롱!

아듀! "film franç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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