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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Jul 03. 2021

대구로의 시간 여행 E3

(2020-10-15) 신천동,신성극장,경북대학교, 동대구역

신천을 따라 걸으니 곧 동신교가 나온다. 동신교를 건너면 신천동이다. 당시 신천동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집이 신천동에 있으면서 삼덕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장기 결석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러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 아이 집에 한번 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몇 명이서 모여 그 아이 집을 찾아 신천동으로 가곤 하였다.


그때는 신천동이 하도 외진 곳이라서, 어른들이 그쪽엔 문둥이가 나온다고 가지 말라고 말렸다. 지금 청구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던 높은 황토 언덕엔 판잣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고, 거기에 살던 아이의 집에 몇 번 찾아갔던 생각이 난다. 움막 같은 집에서 아이는 없고, 그 아이 어머니가 곧 학교에 갈 거라고 하면서 우리들을 돌려보내곤 하였지만, 그 아이는 여간해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동신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중앙중학교ㆍ중앙상고가 나온다. 중앙중학교 옆으로는 범어천이 흐르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이 범어천을 끼고 중앙중학교를 바라보는 집으로 이사 왔다. 이 집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살았다. 옛날 살던 집 근처에 가보니, 집은 벌써 없어지고, 그 자리에 5-6층짜리 병원이 들어서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집 주위에 별로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동네에 얽힌 추억은 그다지 없다.

신천동 중앙상고 옆 범어천

신천교를 지나 다시 신천을 왼쪽으로 끼고 신암교 쪽으로 걸었다. 이곳은 온통 아파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시내에서 동인 로터리를 지나 동촌으로 가는 길을 따라 신암교를 건너면 왼쪽에 <신성극장>이 있었고, 후에는 그 건너편에 신도극장도 생겼다. 두 극장은 국산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재개봉관이었다. 그리고 그 길 건너편 언덕에는 영신 중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다. 영신고등학교는 씨름으로 꽤 유명한 학교이다.


내가 어릴 적 기억이 나는 것은 5-6살 정도부터인데, 그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는 신암동에서 살았다. 7살에 나는 내 나이 또래로는 드물게 유치원에 들어갔다. 뭐 그리 대단한 유치원이 아니라, 영신고등학교 근처에 고아원을 운영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처음으로 유치원을 만들어 교회 건물에서 유치원을 운영한 것이었다. 같은 부지 안에 고아원은 언덕 아래에 있고, 언덕 위에는 교회 겸 유치원이 있었다. 그래서 고아원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사회에서는 깡패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상의 군인이었다. 이들이 행패를 부려도 누구도 그들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경찰이나 깡패들도 완전히 상이군인들에게는 몇 수 접히고 들어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 세계에서는 “고아원 아이”들이 무서웠다. 유치원에서 알게 된 고아원 아이들과 초등학교도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고아원 아이들이 내게 누가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으면 자기들에게 말하라 라고 늘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내가 다녔던 유치원의 이름이 <신성유치원>이었다. 나는 유치원 이름이 <신성극장>과 같았다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느 유치원에 다니느냐고 물어도 그냥 저 쪽에 있는 유치원에 다닌다고 대답했지, 결코 유치원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옛날 살던 집이 있던 곳을 찾았다. 경부선 철도 옆이었는데, 철도 옆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공터를 지나 골목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작았지만, 우리 집 앞집은 제법 크고 좋았던 집으로 그곳에는 <곰보 영감>이라는 심술궂은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곰보 영감 집>이라 불렀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 바로 뒤는 꽤 넓은 웅덩이라 해야 할까, 못이 있었다. 판자로 된 뒷 담장을 들치고 나가면 바로 못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못이 아니라, 업자들이 그곳에 벽돌공장을 만들어 벽돌을 찍기 위해 진흙을 파낸 자리가 큰 못이 된 것이었다. 그곳엔 잠자리가 많아서 여름에는 아이들이 늘 거기서 잠자리를 잡는다고 뛰어놀았는데, 물이 깊어서 익사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아이들이 익사를 하면 부모들이 못가에 제사상을 차리고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는 광경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집 앞에 기찻길이 있다 보니 철도사고도 빈번히 일어났다. 그때 동네에 나보다 한 살 적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서너 번은 기차에 치었다. 아니 기차에 치이고도 어떻게 살 수 있냐고? 그때는 기차가 하도 느리게 달렸으므로, 기차에 치이더라도 튕겨 나와 그저 조금 다치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그 아이는 늘 팔이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었다. 그때는 기차 사고가 나면 기차가 정차하여 뒷수습을 하곤 하였는데, 한 달에도 몇 번씩 사고로 기차가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찻길에서 장난도 많이 쳤다. 레일 위에 못을 올려놓아 납작하게 만들기도 하고, 돌을 쌓아놓아 돌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또 조금 큰 아이들은 달리는 기차에 마구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어느 날 기차에 돌을 던지자 기차가 정차하여 돌을 던진 아이를 찾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돌 던지는 장난을 멈추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집 근처에서도 많이 놀았지만, 경북대학교에 가서 많이 놀았다. 당시 집 마루에서 보면 저 멀리 경북대학교 본관 돔이 보였는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 현재 동대구역 쪽으로 가는 찻길을 건너면 좁은 도로가 있고, 왼쪽에 신암초등학교, 오른쪽에 대구공고가 있었다. 이 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경북대학교 정문이 나왔다.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현재의 경대교 쪽으로 세워져 있는 교문을 정문으로 알고 있겠지만, 당시에는 대구공고 쪽에서 가는 곳에 있는 문이 정문이었다. 현재의 경대교 쪽의 정문 자리는 변변한 문은 물론, 길도 변변치 않았던 마치 개 구멍 같은 출입구였다. 당시 고모님의 집이 바로 지금의 경북대 정문 쪽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안다.

경북대학교 부근

물론 당시 정문이라고 해서 특별히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서부터 경북대학교이니까 정문이라고 했던 것뿐이었다. 문이라기보다는 경북대학교라 쓰인 기둥이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서 본관까지는 내리막 길이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정문 쪽에서 본관 쪽으로 내려가면 정말 신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려 내려가서는 다시 올라오곤 하였다. 그때는 경북대학교가 내 놀이터였다.


그러고 보니 경북대학교와는 인연이 많았던 것 같다. 삼덕동에 살았을 때도 조금만 가면 경북대 의대와 부속병원이 있어 수시로 그리로 놀러 다녔다. 당시로는 드물게 그쪽으로는 가로수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서 그쪽으로 많이 갔던 것 같다.


다시 걸으니 왼쪽으로 파티마 병원이 나오고, 오른쪽 길로 가면 바로 동대구 역이다. 동대구역 가는 길 중앙에는 <히말라야 시다>가 심어져 있는데, 최근 20-30년 동안은 나무가 그다지 자라지 않은 것 같다. 이 나무들은 내가 고1 무렵에 심어진 것 들이다.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집이 서울인 직장 동료가 내게 대구에 가서 아주 이상하게 생긴 처음 보는 나무를 봤다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히말라야 시다>인 것 같았다. 대구에 가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나무가 <히말라야 시다>여서 처음엔 그 말이 믿기질 았았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구 이외에선 <히말라야 시다>를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상전벽해라지만 동대구역 일대만큼 많이 변한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고1 때 공평동에서 신천동 중앙중학교 옆으로 이사 왔다. 그때 막 동대구역 일대가 개발되던 시기여서, 당시에는 청구고등학교에서 파티마병원까지 그 넓은 지역에 건물이라고는 동대구역이 유일하였다. 동대구역 가는 넓은 길들은 대충 포장만 해두었을 뿐이고, 다른 시설은 일체 없었다. 고속버스 터미널도 그 이후에 들어섰다.


도로 바깥쪽은 잡초가 무성한 관리되지 않은 방치 되다시피 한 땅이었다. 이곳저곳에 있는 웅덩이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귀를 찔렀다. 밤이 되면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넓은 길에 가로등만 뿌옇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로수로서 갓 심은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히말라야 시다>만이 줄지어 서있었다.


어느 여름날 그곳에 가니, 가로수 아래로 물방개가 가득 떨어져 있었다. 당시 물에 사는 곤충들 가운데 물방개는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보기 어려운 물방개들이 가로수 아래 여기저기 수북이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마 가로등 불빛을 보고 근처에 서식하는 물방개들이 모여들었으리라.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를 거기서 주운 물방개로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고, 선생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칭찬도 들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나와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면서 옛 생각에 빠지다 보니까 거진 세 시간 가까이 된 것 같다. 기차를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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