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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Jul 01. 2021

대구로의 시간 여행 E2

(2020-10-15) 방천시장과 삼덕동

어제 하루 종일 어머니 집에서 쉬고, 오늘은 다시 돌아가는 날이다. 오전 11시 좀 못 되어 집을 나왔다. 용돈 하라고 주시는 어머니의 봉투를 뿌리치다 못해 할 수 없이 그냥 받아 나왔다. 집에 가는 길은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경전철 노선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대봉교 쪽으로 간다. 이 근처가 <건들 바위>였던 것 같은데,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졸업한 대구중학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고, 또 중학 3년 동안 자전거 통학을 했기 때문에 당시 이 근처는 꽤 돌아다녔다.


조금 더 걸으니 대백 백화점과 대봉교가 나온다. 초등학교 때 삼덕동에 살았기 때문에 여기까진 곧잘 놀러 왔다. 그 당시에는 대봉교가 없었는데, 후에 건설되었다. 옛날에는 신천(新川)을 따라 난 둑길을 방천(防川)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방천길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천대로가 건설되어 있다. 다행히 신천대로 옆으로 보행길이 나 있어 신천을 내려다보면서 수성교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다. 신천은 대구를 동서로 흐르는 강으로서, 금호강의 지류이다. 금호강은 낙동강의 지류이므로, 신천은 낙동강의 손자뻘쯤 된다 할까?


신천 건너편엔 <대륜 중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아파트 촌으로 변한 것을 보니 학교는 벌써 이전한 모양이다. 대륜고교 옆으로 오성고등학교, 남산여고가 있었는데, 이 역시 모두 아파트 단지로 바뀐 것 같다. 옛날 오성고등학교와 대륜고등학교 뒤쪽은 온통 논이었는데, 지금은 대구의 신도시로 변해버렸다.

신천대로

수성교 쪽으로 걷다 보니 옛날 경북고등학교와 대구상고 자리가 나타난다. 이 역시 학교는 이전하고 아파트로 바뀌었다. 동생이 경북고 자리의 들어선 아파트에 살아 몇 년 전 가 본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조용한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져 있었다. 대구상고는 학교 이름까지 바뀐 것 같다.


조금 더 가니 엿 방천시장 자리가 나온다. 그때는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진창으로 변하곤 했던 시장이었는데, 지금은 <김광석 거리>로 바뀌어 대구의 대표적 문화명소로 자리 잡았다. 당시 우리 집이 삼덕동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늘 이 방천시장을 이용하였다. 내가 어릴 태 몸이 유난히 약해, 시장에 올 땐 어머니가 늘 날 데리고 와, 시장 안 식당에서 고깃국을 주문하여 먹게 하고, 그동안 장을 보고 난 뒤 다시 날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때 먹은 고깃국이 무슨 국이었는진 모르겠지만 그때는 먹기 싫어 억지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수성교 입구를 가로질러 큰길을 건너면 바로 삼덕초등학교가 나온다. 삼덕초등학교 입구 초입에 옛날에 제법 큰 만화방이 있었다. 당시 다른 만화방은 두어 평 정도의 넓이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만화방은 거의 10평 정도는 되는 제법 넓은 만화방이었고, 그런 만큼 만화의 종류도 많았다. 그 만화방을 기억하는 이유는 지금도 그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꿈을 종종 꾸기 때문이다. 만화방은 당연히 없어지고, 그 자리엔 미장원이 들어서 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신암 국민학교에서 삼덕국민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을 했다. 초등학교 때 별로 좋은 기억은 없다. 특히 3학년 때 거의 매일 선생에게 맞았다. 여 선생이었는데, 만화하고 무슨 원수를 졌는지, 만화를 봤다고 아이를 그렇게 때리는 거다. 방과 후에 만화가게에 가는 건 물론, 만화방 앞에서 얼씬거리기만 하더라도, 또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 만화 보는데 곁에서 훔쳐보기만 해도, 그걸 갖고 다음날 하루 종일 때리고 교실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지금도 만화를 즐겨 읽는다.


그때 아침 수업 시작 전 30분 동안은 고자질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그 시간이 되면 누구는 어제 뭘 했어요, 또 누구는 어제 뭘 했어요라고 경쟁을 하듯이 선생에게 일러바친다. 그러면 고자질당한 아이들은 불려 나가 벌을 받게 된다. 특히 만화를 본 아이(나밖에 없었지만)에게 가혹하였다. 그래서 만약 방과 후에 내가 만화를 보는 것을 반 아이들에게 들켰다면, 난 그때부터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는 흠씬 맞았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최악의 선생이었다.


학교는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건물이 한두 개 더 들어섰고, 좀 더 깨끗이 정비되어 있었다. 그때 그렇게 넓게 보였던 학교가 그리 크지 않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땜에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한단다.

삼덕초등학교
삼덕동 옛동네

옛날 살던 동네로 가 보았다. 그때 정원수가 우거진 넓은 정원을 가졌던 큰 저택들은 대부분 빌라로 바뀌어져 있다. 그 외 일반 주택들은 건물은 조금 바뀌었지만, 모두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옛날 집을 찾았다. 기역자에 방 4개짜리 한옥으로서, 그땐 좁다고 못 느꼈는데, 지금 대문 틈으로 보니 정말 좁다. 지금도 내 본적지로 되어 있는 곳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는 불교 만(卍) 자 표시와 무슨 신령이니 하는 간판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무슨 무당집이 된 것 같다.


다시 신천에 연한 길, 그러니까 신천대로 쪽으로 걸었다. 당시에는 집에서 좁은 찻길을 건너면 바로 판자촌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방천길이 되었는데, 그 판자촌은 이미 다 철거되었다. 그 당시 그곳은 조그만 판잣집들이 1미터도 못 되는 미로같이 좁은 골목을 끼고 닥지닥지 붙어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친구가 아침에 우리 집에 밥을 얻으러 왔던 기억이 난다. 나도 놀라고 그 아이도 놀랐다. 그때 어머니가 그 애에게 밥을 나누어주고 내겐 학교에 가서 절대 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정말 바가지를 들고 아침, 저녁으로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운 여름날이 되면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전부 방천길로 나왔다. 그리고 길가에 자리를 깔고 시원한 강바람으로 더위를 달랬다. 하늘에는 은하수와 북두칠성, 그리고 이름 모를 수없이 많은 별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별들을 밤늦도록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곳 신천에서는 겨울에는 연을 날리고, 여름에는 미역을 감았다. 그 당시에는 가끔 똥도 둥둥 떠내려오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물에서 수영을 하고 물장난을 하면서 날가는줄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천 가에 있던 한국나일론, 그러니까 지금의 코오롱 공장 옆으로 많은 염색공장과 가죽 공장이 들어서면서 붉고 푸른 염색물을 흘려보내는 바람에 물놀이도 못하게 되었다. 강에 악취도 아주 심해졌다. 물이 점점 더러워지자 우리도 상류로 자꾸 옮겨, 오성고등학교 근처, 그리고 중동교 근처까지 올라가 물놀이를 하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물이 엄청 깨끗해졌다. 그렇지만 아마 지금의 부모들은 위생에 좋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거기서 놀지 못하게 할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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