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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pr 24. 2023

대구 나들이: 중앙통을 걸으며

대구향촌 문화관과경상감영 공원

어머니를 뵈러 대구에 갔다. 대구역에 내려서 중앙통을 따라 명덕로터리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대구역에서 중앙통 왼쪽 인도를 따라 걸어갔으니, 이번에는 오른쪽 인도를 따라가야겠다.


옛날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초까지만 더라도 대구역 부근은 온통 사창가였다. 왼쪽으로는 동인 로터리까지, 오른쪽으로는 자갈마당까지 청과물 시장 등 몇몇 공공시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사창가였다. 지금은 물론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1. 중앙통에서


대구역 광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중앙통>으로 연결된다. 중앙통은 이름 그대로 대구의 제일 중심인 도로로서 남북으로 뻗어있다. 중앙통이 대구 남북을 통하는 중심도로라면, 동서로 뻗은 중심도로는 옛날엔 한일로라 불린 <국채보상로>이다. 그렇지만 국채보상로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6년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중앙통과는 그 역사에서  비교가 안된다. 중앙통은 서울로 치면 종로와 명동을 합친 곳이었다. 이 길을 따라 금은 보석방, 고급 양복점, 큰 서점, 악기상, 고급 술집, 고급 빵집 등 당시 대구의 일류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대구역 횡단보도를 건너 중앙통 오른쪽 인도로 들어섰다. 지금 중앙통 거리는 왕복 1차선 찻길이다. 과거는 이렇게 길이 좁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아마 인도 폭을 늘리고 찻길을 좁힌 것 같다. 그리고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짙은 녹음으로 길 전체가 도로라기보다는 마치 공원과 같은 느낌이 든다. 조금만 올라가면 옛 세비앙 빵집이 있던 곳이다. 중앙통 길 건너편에 맘모스 빵집이라는 역사가 꽤 오랜 빵집이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새로 만들어진 빵집이었다.

중앙통 왼쪽 인도로 들어서면 바로 향촌동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향촌동은 대구 최대의 중심 유흥가였다. 수많은 막걸릿집, 비어홀, 카바레 등이 몰려있는 그야말로 대구를 대표하는 유흥가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로 왔기 때문에 이 향촌동 유흥가를 그다지 경험해 보진 못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술은 조금 마셨던 터라, 대학생 산악부 선배들과 몇 번, 그리고 대학 때는 방학 때 집에 내려와 친구들과 가끔 향촌동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한때는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이곳은 완전히 죽은 유흥가로 변했으나, 곧 이곳을 문화거리로 재개발한다는 것 같다. 대구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재탄생했으면 좋겠다.


2. 향촌 문화관


조금 걷다 보니 <향촌 문화관>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은 대구문학관과 겸하고 있다. 입장료가 1,000원인데 경로우대를 받아 500원이다. 요즘 경로우대로 거의 공짜 문화재 입장료 혜택을 누려왔는데, 이곳은 노인을 반만 존중하나 보다.


보통 이런 작은 문화관이나 박물관 등은 별로 볼 것이 없는데, 여긴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4층인데, 1, 2층은 문화관, 3, 4층은 문학관이다. 문화관을 들어서니  먼저 대구시의 간략한 약사가 나오고, 이어 주로 1950-60년대의 시민들의 삶, 그리고 도구나 풍습, 거리 풍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 주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양복점>

    

양복점  풍경이다. 요즘은 대부분 신사복이나 여자 양장은 모두 기성복을 사 입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웬만하면 맞추어 입었다. 그 당시 대구의 유명한 양복점으로는 <영진 양복점>이란 곳이 있었고, 아래에 있는 <명통구리 양복점>이란 곳도 보고 나니 어슴프레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신사복점은 양복점, 숙녀복점은 양장점이라 했으나, 나중엔 좀 더 멋을 낸다고 그랬는지 양복점은 라사, 양장점은 양행이란 간판을 붙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외갓집은 그 당시 대구의 일류 양장점이 모여 있는 포정동(중앙통을 사이에 두고 향촌동과 반대편 길)에서 양장점을 했다. 나는 엄마를 따라 자주 외갓집에 갔는데, 그러면 당시로서는 아주 세련된 여점원들이 나를 안고 뺨을 부비고 하였는데 그게 그때는 그렇게 싫었다.


<보석상과 시계점>


중앙통에는 고급 보석상과 시계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한 보석과 시계들이 윈도와 진열대에 즐비하였다. 어릴 때야 그런 곳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그냥 지나치기만 했지만, 당시 수준에서는 워낙 조명이 화려하여 지금도 생각이 난다. 사진에 있는 미성당도 당시 중앙통에 있던 유명한 보석상이었는데 이 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화려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대구에서 가장 화려한 상점이 바로 중앙통에 있는 보석상이었기 때문이다.


<올케바닥>  


이 사진은 잘 아시다시피 여러 종류의 <비석치기> 놀이 가운데 하나로서, 비석치기 가운데서는 가장 쉬운 편에 속하는 놀이이다. 이렇게 땅에 그림을 그려놓고 돌를 치면서 하는 놀이를 표준말로는 <비석치기>라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당시 대구에서는 이런 놀이를 <올케바닥>이라고 했다. 또 술래잡기 등 여러 놀이에서 술래를 대구에서는 “올케”라고 하였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는 올케라면 당연히 “술레”를 뜻하는 것이었고, 어른들도 당연히 그렇게 알았다.


TV가 많이 보급되면서 드라마도 늘어나고, 드라마 속에서는 오빠의 아내를 “올케”라고 부르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어른들도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지라 “저거를 우예 올케라카노?”라며 서로 고개를 갸웃뚱하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 나는 이 올케바닥 놀이를 아주 못했다. 이 놀이는 쉬운 단계를 통과하면 점점 어려운 단계로 올라가는데, 나는 쉬운 단계도 제대로 통과한 적이 거의 없었다.


<거리 풍경>


사진에 있는 거리 풍경은 아마 1950년대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60년대 초중에는 가끔 이런 풍경의 거리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보다는 조금 더 나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때는 시내 중심가는 웬만큼 도로포장도 되고 해서 사진에서 보듯이 먼지 나는 비포장 길 옆에서 제범 번창하게 장사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납작 만두>


납작 만두는 얇은 만두피에 당면이나 부추 등을 약간 넣은 납작한 만두인데, 지금도 대구 특유의 먹거리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택배로 납작 만두를 구입하여 집에서 먹을 때가 있다. 그런데 납작 만두는 역시 돼지비계로 “꾸버야” 맛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주 어릴 때는 납작 만두를 본 적도 먹은 적도 없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쯤 몇몇 곳에서 납작 만두를 파는 것을 보았고, 대학에 다닐 때쯤 납작 만두가 대구의 먹거리로 일반화되는 것 같았다. 만두 속에 들어가는 것도 별로 없고, 어떨 때는 밀가루 냄새가 나기까지 하는 납작 만두가 어찌 그리 맛있는지 알 수 없다. 돼지기름 때문인가? 집에서는 식용유를 사용하여 굽기 때문에 아무래도 납작 만두의 맛이 덜하다.


<가족계획 표어>


요즘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다고 하여 출산율 높이기가 국가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데, 1960년대 당시는 인구증가율이 너무 높아 출산율을 낮추는 것이 국가적 과제였다. “인구폭발”이라는 말이 귀에 익숙해졌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우리나라의 인구증가가 너무 빨라 이대로 가면 모두 굶어 죽는다고 가르쳤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우리나라 연간 인구증가율이 2.8%였다. 학교에서 인구증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우고 와서 집에서 우리나라 인구문제를 혼자서 걱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부터 나라를 걱정하였나 보다...ㅎㅎ


<선술집>


1960년대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술집들이다. 향촌동에 있던 술집들은 이런 선술집보다는 방에 앉아서 먹는 술집들이 많았던 것 같다. 또 그 당시에는 방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였으며, 이것은 비단 시내 번화가뿐만 아니라 일반 주택가에 있는 작은 술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술집에는 대개 작부(酌婦)라 하여 함께 술을 마시는 젊은 여자들이 있었으며, 이 여자들은 술과 안주를 주문하여 매상도 올리면서, 어떨 때는 슬쩍슬쩍 술을 버리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신천동 중앙상고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전형적인 주택가였는데, 우리 옆 집이 구멍가게도 하면서 탁자를 두어 개 가져다 놓고 술도 팔았다. 술꾼들이 저녁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물론, 우리집 담벼락은 완전히 술꾼들의 방뇨 장소가 되어버렸다. 암만 방뇨를 못하도록 경고문을 써붙이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에는 방뇨를 할 곳이 우리집 담벼락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또>


설탕을 불에 녹여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것을 대구에서는 “포또”라 했다. 표준말로는 “달고나”라고 하며, 또 서울에서는 “또뽑기”, 줄여서 “뽑기”라 하는 것 같다. 심심풀이 삼아 사전을 찾아보니 “포또”를 “달고나”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나와있어, 그래도 “포또”는 꽤 알려진 사투리인 것 같다.


포또 장수들은 설탕만을 녹이여 마치 꿀물과 같은 액체상태가 된 것을 가지고, 쉽게는 “8”자, 어렵게는 새, 코끼리, 배, 자동차 등 무궁무진한 조각품을 만들어 내었다. 설탕을 녹인 액체에 소다를 넣으면 이것이 누런 색으로 크게 부풀어 오른다. 설탕액만으로 만든 포또는 모양을 잘라내는 데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누런 색으로 부푼 것으로 만든 포또는 그래도 부수지 않고 모양을 잘라내기가 쉬워 몇 번은 성공한 적이 있었다.


<시인 이상화와 ‘깝치지 마라’>


대구 출신으로서 경기도에서 어느 큰 병원 원장을 하시는 분이 자신의 운전기사로부터 항의를 받아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는 일을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 분이 어디 외출 준비를 하면서 운전기사에게 “좀 깝치지 마라”라고 하였더니, 그 기사가 큰 모욕을 당했다고 하며 병원장에게 항의를 하고, 또 노조에서도 이 사건으로 들고일어나 큰 문제로 비화될 뻔했다는 것이다. “깝치지 마라”라는 말은 대구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말로 “재촉하지 말라” 혹은 “채근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내가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내게 자꾸 빨리 준비하라고 채근하면 그때 내가 집사람에게 하는 말이 “좀 깝치지 마라”이다. 나도 이것이 당연히 표준말인 줄 알았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경상도 사투리라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표준말로는 “깝치다”를 “깝죽거리다”. “까불거나 잘난 체하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이 표준말이란 것도 좀 의심스럽다. 요즘은 인터넷 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깝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보는데, 이 전에는 “깝죽거리다”라는 뜻으로 “깝치다”란 말을 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최근에 사람들이 그런 뜻으로 사용하니까 사전에서도 그냥 이것을 표준말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독고다이”를 찾아보면 “스스로 결정하여 홀로 일을 처리하거나 그런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이건 아니다. 독고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식 발음으로서 가미가제 특공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독불장군이란 뜻으로 와전되어 사용되니까 아예 사전에서도 그것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깝치다”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의 대구 출신 민족시인 이상화는 그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여기서도 “깝치지 마라”는 채근하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생략)



<문화극장>


어릴 때부터 극장에는 꽤 많이 다닌 편이었다. 그런데 대구에 <문화극장>이란 극장이 있었나?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가서 생각이 났다. 대구역에서 동인 로터리로 가는 길과 옛날 대구법원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자리쯤에 <군인극장>이라는 극장이 있었다. 주로 군인들이 이용하도록 만든 극장이었는데, 일반 사람이 들어가도 상관은 없었다. 건물은 상당히 좋았는데, 상영되는 영화나 화면 같은 이른바 소프트웨어는 형편없었다. 또 한 번 상영이 끝나고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한 시간 이상 길 때는 두 시간가량 기다려야 하였다. 그래서 영화 상영 중간에 들어간 사람은 영화를 모두 본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대신 값은 아주 싸서, 변두리에 있는 재재 개봉관의 반도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이 극장이 나중에 <문화극장>이란 이름을 변경하여, 외국영화 상영 전문의 재개봉관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외국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상영하였다. 여기서 나는  서부극 <링고 키트>와 그리스 신화를 내용으로 한 <타이탄>이란 영화를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3. 경상감영 공원


지금은 대구에 비해 부산이 훨씬 큰 도시로 발전했지만, 전통적으로 경상도의 중심도시는 대구이다. 그래서 지금의 경상도 지사에 해당하는 경상감사는 대구에서 집무를 보았고, 경상감사가 집무를 본 현대의 도청에 해당하는 경상감영은 당연히 대구에 소재하였다. 경상감영은 향촌동 술집 동네와 바로 붙어있는데, 과거에는 이곳이 거의 방치되어 있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쯤인가 해서 이곳을 새로이 단장하여 <중앙공원>이라 하였다. 경상감영 터가 중앙공원으로 바뀌면서 사람들도 많이 찾게 되었다. 특히 고등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서 각광을 받았다.


향촌 문화관을 나와 다음은 중앙공원으로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공원 이름이 <경상감영 공원>으로 바뀌었다. 무미건조한 중앙공원이란 이름보다는 이곳의 역사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경상감영 공원”이라는 이름이 훨씬 좋아 보인다. 내가 이곳을 찾은 지는 몇십 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전에는 나무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건물도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지금 보니 과거에 조그마하던 나무들이 커져 짙은 녹음을 이루고 있고, 또 여러 채의 부속 건물과 종각, 분수대까지 들어섰다. 어느 도시에 내놓더라도 빠지지 않을 대구의 명물 공원이 된 것 같다. 그렇지만 과거와 차이라면 이전에는 주로 어린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청년들이 많았는데, 지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거의가 노인이다.


그래도 시내 한가운데 중심지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앞으로 이 일대가 재개발되어 문화거리로 재탄생된다면 공원과 주위 거리가 더욱 잘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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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려고 공원을 나오니 어머니가 전화를 하셔서 왜 아직 오지 않느냐고 한다. 이래서 걸어서 가는 것은 포기하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정거장에게 고등학생에게 “명덕 로터리” 가는 버스를 물으니 의아한 듯 “명덕 사거리요?”하고 되묻는다. 자주 가서 자주 돌아다녀야 지명도 생소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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