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치하에서 천여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토마스 키니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시 폴란드에서 수용소에 갇힌 1,200명의 유대인을 구출한 독일인 오스카 신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1939년 9월 폴란드는 독일의 침공에 의해 점령되어 독일의 지배하에 놓였다. 독일군의 통제 하에 폴란드에 거주하는 약 1만 명의 폴란드계 유태인들은 폴란드 남부의 도시인 크라쿠프로 이송되었다.
한편 체코 태생의 독일인 사업자이자 나치당원인 오스카 쉰들러는 전쟁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 위해 크라쿠프로 온다. 쉰들러는 사업을 하기로 하였지만 사실 그는 돈이 없다. 그는 독일군에 압수당할 위기에 있는 유태인 기업과 자본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는 유태인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 테니 공장을 넘기고 자본을 대라고 요구하는 대신, 독일군에게는 군사물자를 생산할 테니 사업을 인정해 주고, 공장 노동자로 고용하는 유태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한다. 그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 사업에 여러 편의를 제공받는다.
수많은 유대인을 거의 무임금으로 고용한 덕택에 쉰들러는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한편 처음부터 쉰들러를 도운 유태인 회계사 아이작 슈탄은 가능한 한 많은 동료 유대인을 쉰들러의 회사의 고용함으로써 그들의 목숨을 구한다. 그렇지만 폴란드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점점 심해지고, 쉰들러의 사업도 점차 어려워진다.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을 지키기 위하여 뇌물과 인맥을 통해 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는다.
크라쿠프 강제수용소의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한 독일군 중위 아르몬 게이트는 인종분리 정책을 무자비하게 시행한다. 그의 눈에 태만해 보이거나, 노동력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눈에 띄는 대로 총살해 버린다.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이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군에 막대한 뇌물을 바친다. 지금까지 쉰들러가 유대인 노동자를 지켜왔던 것은 자신의 공장을 제대로 돌려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쉰들러는 차츰 유대인을 돈벌이의 수단 이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쉰들러는 게이트 소장과 함께 술을 마시며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옛 로마 황제의 예를 들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게이트를 설득한다. 쉰들러의 말에 감명을 받은 게이트는 지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왔으나 이제 자신의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다. 게이트는 곧 옛날로 돌아가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
쉰들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게이트 소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참석자는 나치당 당원이었다. 이 자리에서 쉰들러는 자신에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한 유대인 여인과 어린 소녀에게 감사의 키스를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 놀란다. 얼마 후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건강 검진을 실시한다. 목적은 건강한 사람은 살려두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은 죽여 수용소의 경비를 줄이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벌거벗은 채로 나치 의사들의 진단을 받고, 운명이 결정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트럭으로 어디론가 실려간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어디론가로 보내졌다. 그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갈증에 시달리며, 조그만 열차창을 통해 물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쉰들러는 역에 설치된 방화수를 기차에 뿌려 그들의 갈증을 덜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쉰들러의 행동은 독일의 인종분리법을 위반하였다 하여 감옥에 갇힌다. 몇 달 후 풀려난 쉰들러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도시 근처의 언덕에서는 수용소와 정착촌에서 살해된 1만여 명의 유태인들의 시체를 소각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체가 타는 냄새는 온 도시를 덮쳤다.
쉰들러는 그곳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든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쉰들러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모두 아유슈비츠로 보내지게 되어 공장도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쉰들러는 지금까지 자신과 일한 유대인 노동자들을 죽음의 길로 끌려가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돈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는 게이트 소장에게 돈을 주고 유대인을 사들이는 계약을 제안한다. 게이트 소장은 쉰들러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쉰들러가 그 대가를 크게 높이자 결국 승낙한다.
쉰들러는 슈탄과 함께 구출해야 할 유대인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공장의 출자자들을 모으려고 하지만, 출자자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크게 낙담한 리스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동원하여 한 명이라도 더 유태인을 구하려고 하였다. 쉰들러의 용기에 감동한 슈탄은 구출대상자 명단을 보여주면서 “이건 생명의 리스트입니다”라고 말한다.
쉰들러는 구조자 명단을 게이트 소장에게 넘겨주고, 리스트에 올라 살아남은 유태인들을 쉰들러의 고국인 체코로 추방하도록 주선한다. 그러나 착오가 발생하여 남자들을 태운 기차는 체코에 무사히 도착하지만, 여자들을 태운 기차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다. 체코로 간다고 생각했던 여자들은 수용소 경비병들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호소하지만, 그녀들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머리를 깎인 채 대형 샤워실 같은 곳으로 끌려들어 간다. 이미 가스실에 대해 알고 있는 여자들은 이제 죽었다고 체념하고 있는데, 샤워기에서는 가스가 아니라 물이 쏟아진다. 여자들은 살았다고 안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쉰들러는 곧바로 아유슈비치 수용소를 방문한다. 그는 나치 수용소장에게 자신의 명단에 있는 유태인 여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수용소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전혀 대응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쉰들러는 수용소장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값비싼 보석과 뇌물을 주고 여자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체코행 기차에 태우는 데 성공한다.
해방된 유태인들은 체코에서 쉰들러의 군수품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일하게 된다. 얼마 후 독일의 무조건 항복소식이 전해졌다. 쉰들러는 독일군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유대인들을 살해할까 우려하여 공장에 주둔한 나치 병사들에게 “살인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가족에게 돌아가라”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유대인 직원들과 함께 죽은 유대인들을 위한 묵념을 드린다.
유대인들은 해방되었다. 쉰들러가 아내와 함께 공장을 떠나려 할 때, 슈탄은 지금까지의 쉰들러의 공적을 기록한 문서와 반지를 전해준다. 반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금니를 녹여 가공한 것으로, 쉰들러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와 감사를 표시한 선물이었다. 유대인들의 마음에 감격한 쉰들러는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흐느낀다. 쉰들러는 유태인들과 뜨겁게 포옹한 후 그곳을 떠난다.
슈탄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다. 게이트 소장은 체포되어 전범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스카 신들러는 그 후 유대인들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1974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들러에게 구출된 유대인의 자손은 6,000명 이상이 되었다. 그들은 매년 오스카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시하며 꽃을 바친다.
전쟁 후 사업가로서의 쉰들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여러 사업에 손을 대었으나, 연이어 실패하였다. 그의 어려움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자, 유대인들은 그를 이스라엘로 초대하였다. 이때부터 오스카 쉰들러는 일 년의 반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나머지 반은 예루살림에서 자신이 구해준 유대인들과 함께 보냈다. 이러한 생활은 197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의 묘는 자신의 희망대로 예루살렘의 로마 가톨릭 교회 묘지에 만들어졌다.
그가 죽기 2년 전 이스라엘의 헤브라이 대학 구내에 그를 기념하는 방이 만들어지고, 그곳에는 그에 의해 목숨을 구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보존되었다. 쉰들러의 업적이 세월과 함께 점차 잊히는 가운데, 1982년 오스트리아의 작가 토마스 키니리가 논픽션 소설 “쉰들러 리스트,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한 독일인”을 발표하였고,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1982년 부커상을 수상했다. 오늘 소개한 영화는 바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