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14) 십만양병론은 가능했는가?

by 이재형

율곡이 외침에 대비하여 십만양병론을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다. 율곡의 저서나 당대 기록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없고, 후대 율곡의 제자들의 저서와 <선조수정실록>에 이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도성에 중앙군 2만, 팔도에 지방군 각 1만 명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의 십만양병론의 진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에게 맡겨 두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 가능했다면 과연 왜군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역사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10만의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하나 제기된다. 당시에도 당연히 조선에 군대는 존재했다. 비록 서류상의 명목상 군대이긴 했으나 장부상으로는 약 30만 명의 상비군이 있었다. 실제로도 오합지졸이긴 하지만 최소한 몇만 명 정도의 군대는 있었다. 십만양병론이 이들 외에 추가로 10만 명의 군대를 증원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병력을 포함하여 10만 명의 정예군을 양성하자는 것인지 어느 쪽일까?

10만 양병론을 주장하는 율곡

십만양병론에서 중앙군 2만, 지방군 8만을 두자고 했으니 아마 10만을 증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10만의 정예군을 만들자는 의미인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10만 양병은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은 건국 초기 이미 20만에 가까운 상비군을 둔 경험이 있다. 그리고 율곡의 시대에도 30만에 가까운 병력에 소요되는 비용이 투입되고 있었다. 다만 군정의 문란과 부패로 그 비용이 군에 투입되지 못하고 탐관오리의 사복으로 흘러 들어갔다.

군정의 문란

만약 군정이 엄정히 확립되고 부패를 척결할 수 있었다면, 10만 정예군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류상으로는 30만 대군을 유지할 자원이 어딘가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군정의 확립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맨날 놀며 말썽만 부리는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만 한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정예 조선군

그러면 만약 10만 정예병을 양성했다면 일본군과 대등히 싸울 수 있었을까? 그래도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조총이라는 무기의 격차는 제외하자. 조선에는 병사들을 정예군으로 육성할 군사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다. 200년간 지속되어온 평화는 조선의 군사적 잠재력을 소멸시켰다. 북방에서 벌어지는 외적과의 전투는 게릴라전에 대한 토벌 성격이었다. 소대 단위, 기껏해야 중대 단위의 소규모 비정규전이었다. 이러한 전투 경험으로 수천, 수만의 대군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대형 야전을 제대로 치러낼 수는 없다.

여진과 싸우는 조선군

일본군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거쳐오면서 진형, 전투 방식, 명령 체계 등을 발전시켜왔다. 이에 비해 조선은 이러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시대 조선에서도 중국의 병법서나 정도전이 지은 <진법(陣法)> 등의 군사 전문 서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한 군 지휘관들이 병사들에 대해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지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지휘관 자체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일본군의 전투 방식을 보면 일본 국내에서의 전투와 조선에서의 전투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사람들은 보통 일본의 전쟁에서 군사들은 칼을 많이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주력 부대는 장창(長槍) 부대이다. 밀집 대형을 이룬 장창 부대 사이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여기서 대형이 무너지면 일방적으로 패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칼은 언제 사용하는가? 쌍방의 대형이 무너져 막장 개싸움이 벌어지거나, 패주하는 적병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할 때 사용한다.

일본군 장창부대 사이의 전투

그런데 조선에서의 전투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조선군은 급조된 병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접전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은 움직임이 둔하고 번거로운 장창 부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칼을 휘두르며 조선군의 진영에 뛰어들었으며, 조선군은 맥없이 패퇴했다. 용인 전투에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00여 명의 병력으로 정면 공격을 감행해 약 5만 명(기록에 따라 최대 8만 명)의 조선군을 궤멸시켰다. 실전 경험의 차이는 이렇게 중요하다. 와키자카는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장수이다.

조선진영에 난입하는 일본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전쟁이 종식되고 곧 에도 막부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은 200여 년간 평화 시대가 계속된다. 이 시기에도 각 번은 막부가 정한 법에 따라 군대를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이 시기 일본 전체의 병력은 40~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평화 시대에 군대란 필요 없다. 일본에서도 군정은 완전히 난맥상을 보이며, 병력은 서류상의 군대로 전락한다. 훈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무라이에게 있어 무술은 스포츠 내지는 건강을 위한 운동 정도로 전락한다.

군사훈련을 게을리하는 에도시대 사무라이

일본이 개항하면서 서구의 동향을 보고 일본도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자각이 싹텄다. 막부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군사고문단을 초청하여 근대식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프랑스 고문단으로 온 샤를 샤누안(Charles Chanoine) 대위는 본국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1개 분대로 일본을 점령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만큼 서구의 눈으로는 일본군이 지리멸렬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 발언은 막부의 귀에도 들어가 서구식 근대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군대의 힘은 내부적 상황과 함께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조선의 너무 길었던 평화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비극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운명이라 해야 하나?

샤를 샤누안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