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를 만나지 못한 원숭이 도시 롭부리

​(2026-01-31) 동남아 횡단여행 (29)

by 이재형

오늘은 시암 왕국의 첫 번째 수도였던 수코타이(Sukhothai)로 이동하는 날이다. 중간에 들를만한 도시가 없는지 찾아보았더니 '원숭이의 도시' 롭부리(Lopburi)가 있다. 롭부리는 아유타야가 시암 왕국의 수도였던 시대에 제2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유서 깊은 도시다.


롭부리는 원숭이의 도시로서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다. 이 도시가 이렇게 원숭이의 천국이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원숭이를 길한 동물로 여긴다. 롭부리는 과거 크메르 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힌두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현지인들은 이곳의 원숭이들을 자신들의 건국 신화(Ramakien)에서 건국에 도움을 준 원숭이 왕 하누만(Hanuman)의 후예라고 믿으며 신성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유타야 기차역
롭부리행 로컬 열차
롭부리 기차역

게다가 롭부리 시내 중심가에는 고대 크메르 양식의 사원들이 남아 있는데, 이 사원 유적들이 원숭이들에게 안전한 은신처와 서식지를 제공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거주지와 사원이 밀착되어 있어 원숭이들이 자연스럽게 도심 생태계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아유타야 역으로 왔다. 그런데 롭부리행 열차가 12시 15분에 있다고 한다. 거의 3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버스 터미널로 가볼까도 생각해 봤으나, 거기도 빠른 차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롭부리까지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인데 기차 요금은 14바트(약 600원). 에어컨도 지정석도 없는 완전 로컬 열차이다. 근처 조그만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태국에서는 기차 연착이 일상화되었다는데, 이번엔 예정된 시간에 왔다. 객차가 완전히 우리나라 1960~70년대의 완행열차 같다. 빈 좌석이 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일찍 열차에 오른 덕택에 자리를 잡았다. 천장에는 몇 개의 선풍기가 돌고, 모든 창문은 연 채로 달린다. 좌석은 등받이가 곧게 세워진 마주 보는 형태다. 창밖으로 한가로운 태국의 농촌 풍경이 지나간다.

롭부리 역에서 내렸다. 먼저 오늘 수코타이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아야 한다. 수코타이는 기차역이 없어 피사눌록(Phitsanulok)으로 가서 그곳에서 60km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런데 밤 시간에 차가 운행할지 알 수 없다. 롭부리에 도착해 일단 수코타이로 바로 가는 버스나 밴을 알아보니 없다. 할 수 없이 기차를 타고 갈 수밖에 없다. 16시 30분발 피사눌록행 기차표를 끊었다. 에어컨 실이 매진이라 선풍기 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롭부리 역 바로 맞은편에 있는 왓 프라 프랑 삼욧(Wat Phra Prang Sam Yod)이 롭부리의 대표적 명소다. 이곳에 원숭이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왔다. 아주 멋진 사원 유적이다. 아유타야 역사공원의 유적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덥다. 오후 2시, 열대의 땡볓 아래서 발 한 자국 한 자국을 떼기가 너무 힘들다.

유적들의 보전 상태도 아주 좋다. 유적의 그늘에서는 여러 명의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온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정작 중요한 원숭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원숭이들이 있을만한 곳을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늘이 많고 외져 보이는 장소가 보여 원숭이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은 되는데, 도저히 힘이 들어 그곳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


나무 그늘에 빈 벤치가 보여 앉아 쉬었다. 바람이 불어와 조금 선선했다. 어제부터 더위 탓인지 자꾸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며 식욕도 없다. 인공지능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전형적인 일사병의 초기 증상으로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며 즉시 시원한 곳으로 옮겨 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도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다. 즉시 역사로 돌아와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쉬었다. 에어컨이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 보이지 않는다.


롭부리에는 역이 두 개 있다. 내가 타야 할 열차는 롭부리 제2역(복선화 공사로 인한 신설 고가역)에서 출발하므로 셔틀을 타고 그리로 이동하란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툭툭을 타고 롭부리 제2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결국 원숭이를 보려 했던 당초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수코타이로 가는 교통편만 아주 꼬이게 되었다.

열차는 3등 칸이다. 특급열차라고는 하지만 객실 차량은 로컬 열차와 차별이 없다. 에어컨이 없으니 창을 연 채로 달린다. 매캐하고 습기 찬 디젤 매연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이렇게 4시간을 조금 넘게 걸려 피사눌록에 도착하였다. 이제 수코타이행 버스를 타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피사눌록 역 앞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 묵고 내일 수코타이로 이동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혀 정이 가지 않는 도시이다. 수코타이행 버스 정거장까지는 약 1km. 어중간한 거리라 그냥 걸었다. 그런데 도착하니 벌써 버스는 끊어졌다. 난감하다. 그런데 도저히 묵을 마음이 들지 않는 도시이다.


그래, 그냥 치앙마이(Chiang Mai)로 가자. 일사병 위험까지 무릅쓰고 수코타이 유적지를 탐방할 필요가 없다.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새벽 1시 59분발 치앙마이행 열차에 에어컨 슬리핑 좌석이 딱 1개 남았다. 그 표를 끊었다. 네 시간 기다렸다가 바로 치앙마이로 가는 것이다. 이럴 것 같았으면 바로 아유타야에서 치앙마이로 가야했는데, 정말 오늘 헛고생만 잔뜩 했다.

롭부리 2기차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