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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Dec 21. 2022

돌봄은 self

나를 살피는 이기심은 필요충분조건

  

지나간 추석의 일이다. 시가 2층 계단에서 미끄러지면서 남은 계단을 엉덩방아를 찧은 채 내려왔다. 쿵쿵쿵. 엉덩이에 몰린 엄청난 무게는 곧 극심한 통증이 되어 몰려왔다. 뭘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시가 식구들 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견딜 수 없는 통증 앞에 창피함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설상가상 엉덩이 주변 근육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더니 다리가 어디로 도망이라도 간 듯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 내 머리 위로 가족들의 놀란 눈이 총총 떠올랐고 시어머님의 지휘 아래 엉덩이 계곡엔 커다란 파스가 자리 잡았다. 그러고서도 좀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 자리에 한참을 누워 있어야 했다. 심상찮은 통증에 창피함까지 더해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추석 당일 아침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병원에 가거나 집에 가지 못했다. 그해 추석엔 연휴 내내 시댁 행사가 이어진 바람에 그 상태로 꼬박 사흘을 보내야 했다. 통증이 남달랐지만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아서 근육도 뼈도 좀 놀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밤마다 아팠지만 새 아침이 될 때마다 곧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무사히(?) 며느리로서의 명절 미션을 끝내고 연휴 마지막 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미뤘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정형외과에서 꼬리뼈 골절 진단을 받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아팠던 거구나.    

진단명이 나오자 꼬리뼈도 꼬리뼈지만 남편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나보다 부모가 우선인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보여주니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빈말이라도 병원에 한 번 가보자는 말이 그렇게나 어려웠던 걸까. 남편에게 진단 결과를 전했더니 그제야 얼른 입원하라고 했다. 막 퍼붓고 싶은 마음과 달리 그저 눈물만 났다. 이런 사람을 믿고 사는 게 맞나? 때마침 다가온 입원이라는 적절한 방법의 별거에 돌입했다. 이후 남편은 끼니마다 먹고 싶은 건 뭔지, 퇴근하면서 필요한 걸 사 간다고 곰살맞게 연락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눈치 빠른 남편은 나의 사나운 심사를 알아챘으나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고 나도 당장은 전투력이 부족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한 마음속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 일은 마음에 생각지 못한 무늬를 남겼고 격심한 타격감과 통증은 꽤 오래 일상을 지배했다. 통증을 견디면서 묵묵히 보내야 했던 추석의 기억과 며느리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 대상을 가리지 않는 서운함이 물밀 듯 밀려들어 검푸른 감정의 파도 위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못했다.     


서운함처럼 가벼운 감정은 감정의 파고 속에서 차츰 자취를 감췄지만 어떤 것은 깊게 가라앉아 나를 붙잡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입으로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 괜찮냐고 묻는 가족들에게 애써 괜찮다고 했다는 것. 나부터 나를 방치했던 것이다. 수많은 상념 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감정은 나를 향한 책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코파이뿐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많이 아프니까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해야 했다.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데 그걸 못했다. 결국 남일수밖에 없는 타인에게 나의 안위를 맡기고 마음대로 서운해했다. 이것은 만용인가 어리석음인가. 아마도 둘 다겠지. 그 생각에 이르자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동시에 뭔가 선명해졌다.


나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 그것은 실로 의외의 감정이었다. 나는 제법 내 욕망에 귀 기울이며 원하는 삶을 실현해 간다고 여겼다. 다른 이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은은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응급상황에서 드러난 스스로에 대한 방관은 더 큰 실망을 남겼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가족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쪽이 마음 편해졌고 욕구를 참아낸 뒤 받는 가벼운 칭찬과 인정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잦아지고 익숙해질수록 나를 보살피고 안부를 묻는 스스로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땐 잔뜩 위축되어 안으로 숨어드는 나만 남았다. 많이 아프다고, 병원에 좀 가야겠다고 왜 말하지 못했는가. 걱정하며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가족들에게 애써 괜찮다고 말한 나는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누군가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라 했다. 그 말처럼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이해 호르몬이 분출되는지 쓸데없이 남편의 선의가 느껴졌다. 그 정도일 줄 몰랐으니까, 출렁거리는 차에 타는 게 더 안 좋았을 테니까, 남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자 마음이 살금살금 풀렸다. 하지만 몸상태는 마음의 회복을 따라가지 못했다. 3개월이면 큰 통증이 멈출 거라는 의사의 예상과 달리 묵직한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고 사고부위 말고도 허리, 어깨에서 통증이 잇따랐다. 산책은커녕 의자에 제대로 앉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하루종일 누워 있다 보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빠져나가는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오늘의 일분일초가 더없이 아까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앉고 걷는 건 물론이고 똑바로 눕는 것도 불편한 이 상황을 견디는 것만 가능했다. 몸의 중심이 무너지자 매일 아침 몸 여기저기가 새롭게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과연 예전의 건강했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무엇하나 자신 없는 순간이 이어졌다.     


통증의 시간을 견딜 무언가가 필요했다. 몸과 마음의 요구에 잔뜩 귀를 기울였다. 몸은 한없이 늘어졌지만 머릿속만큼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예상치 못한 엉덩방아처럼 예고 없이 찾아올 나의 마지막에 대한 상념이 난데없이 몰려왔다. 갑자기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무섭지만 피할 수 없는 삶의 순환이 느껴지자 흘러가는 지금, 여기가 더없이 소중했다.     


김범석 작가의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의미 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생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나를 위한 ‘이기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있어야 타인에게 허락할 마음의 여유 또한 스며든다. 뼈아픈 경험을 그저 아픈 기억으로 흘려보낼 순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만큼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겨야 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이번 일은 그저 사고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다시 세우고 회복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와 문화가 나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하느라 전전긍긍했던 시기를 떠나보내고, 주어진 규범이나 사회적 인정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인정받기를 갈구해야 한다. 그렇게 심정적으로 확실히 독립함으로써 삶의 후반기를 충만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yte)는 그의 저서 <세 번의 결혼>에서 일생 동안 우리는 3번 결혼한다고 말한다. 한 번은 배우자와, 한 번은 일과, 또 한 번은 스스로와. 배우자와는 갈등이 깊어지면 헤어질 수 있다. 일이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 땐 그만둘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면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만둘 수도, 이혼할 수도 없는 관계 속에서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나와의 결혼은 몇 번이고 가능하지만 ‘유체이탈’이 아닌 이상 이혼은 불가능하다. 꼬리뼈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나와의 새로운 결합을 예고한 신호탄이 되었다. 돌봄은 self. 화내지 말고 당당하게 요구하자. 이기적일수록 내 인생의 주인공에 가까워진다. 다행히 기회는 아직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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