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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Feb 05. 2023

한기와 허기

마음이 부를 땐 기꺼이 허락하기

새벽과 아침 사이의 어스름한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지 몇 주째다. 새벽출근하는 딸을 지하철역에 내려주고 나면 잠도 쫓고 추위도 쫓으려고 아파트 헬스장으로 향한다. 딸 덕분에(?) 강제 미라클모닝과 아침운동을 시작한 셈이다. 처음엔 긴장한 탓인지 꽤 할만했다. 북적이는 지하철 역의 인파를 보면 자극도 됐다.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어렵게 확보한 아침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아침 운동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운전하는 내내 그렇게나 하품이 났다. 오슬오슬 추운데도 졸음이 훅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주차를 마쳤는데도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집에 올라가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좀 쉬고 싶다는 몸의 신호를 넙죽 받아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집에 들어가면 오전 내내 잘 게 뻔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시 멍타임을 가졌다. 잠깐 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긴장과 마음의 번잡함은 잠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를 가까스로 이기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런싱머신에 올라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느린 걷기를 시작했다. 1분에 한 번씩 까르륵 넘어가게 웃던 팟캐스트인데 오늘은 전혀 신나지 않았다. 몸이 천근만근 같았다. 마음도 덩달아 자꾸 가라앉았다. 하나마나한 속도로 걷는 것 같아서 속도를 조금 높였다가 곧 낮췄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무거운 기운이 나를 밑으로 밑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30분을 채웠는데도 한기는 여전했다. 실내온도 24도. 추울 리가 없는 온도였다. 운동 뒤엔 늘 살짝 더워졌었는데 오늘은 한기만 돌았다. 집에 도착해 두꺼운 이불 앞을 서성이다 무릎담요만 끌어안고 소파에 잠시 누웠다.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너무 추워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30분이 지나 있었다. 속이 비어서 그런가 싶어서 눈에 띄는 소금빵과 바나나와 야채 주스를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한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두꺼운 이불을 끌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한참 뒤 깼다. 그사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다행히 몸은 후끈해져 있었다.


허투루 보낸 오전을 만회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릴 뭔가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첫 번째 책을 쓰던 단골 카페에 가서 아이스라테를 마셨다. 가져간 책을 읽고 글도 몇 자 끄적였다. 오전의 푹잠 덕분인지 집중이 잘 됐다. 늦은 일과의 시작이었지만 오히려 약이 된 것 같아서 놓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한기를 이기고 그날의 일정을 마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허기에 시달렸다.


오자마자 베이글 한 개를 뜨끈하게 데워 먹었지만 헛헛했다. 과자 한 봉지를 뜯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보였다. 그런데도 허기는 여전했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왕뚜껑 큰 사발을 뜯었다. 왕뚜껑 컵라면 물을 올리면서 가슴과 머리의 머나먼 거리를 여실히 알게 됐다. 머리로는 '물 올리면 안 돼. 조금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잖아. 한 시간만 참자. 이미 많이 먹었어.' 라며 나를 말렸지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국물까지 클리어하게 만들었다.


한기와 허기에 하루 종일 끌려다닌 그날, 한기와 허기는 다 마음이 시킨 일이란 걸 여실히 깨달았다. 고만고만한 내 인생을 자각하고 고명 없이 밋밋한 삶에 대해 쓴 어제의 각성은 오늘까지 나를 쥐고 흔든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자꾸 생각하면 그 생각은 길을 만들고 결국 고속도로가 되어 저절로 나를 몰아간다. 풀 수 없는 불만과 해결되지 않는 현실은 튼실한 베이글 한 덩이로도 뜨끈한 왕뚜껑 사발면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몸은 한기와 허기로 신호를 보냈다. 너의 마음은 지금 몹시 춥고 텅텅 비어있다고. 날은 추워도 몸이 느끼는 계절은 아이스라테를 불러오듯 아무렇지 않은 채 했던 내 마음도 기운을 북돋아줄 탄수화물을 마구 끌어당긴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은 대패삼겹살 듬뿍 구워 넣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그렇게 퍼부어 먹어놓았으니 저녁은 안 먹는다 안 먹는다 하면서 또 몇 숟갈 퍼먹겠지. 그래 이참에 좀 채우고 가련다. 두꺼운 이불속 뜨끈한 잠이 몸속 깊이 숨은 한기를 몰아냈듯이, 든든하게 속을 채우다 보면 마음의 허기도 어느새 사라지겠지. 날은 여전히 춥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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