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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 들이듯 말하기

<고르고 고른 말>을 읽고

by 정희


작년 여름 ‘책과 인쇄박물관’에 다녀왔다. 그때 벽면 가득 꽂힌 자음과 모음 조각을 보고 잠깐 먹먹했다. 어릴 적 동네 인쇄소에서 보았던 정교하고 예쁜 조각이 떠올라 옛 생각도 나고, 작은 돋보기에 의지해 활자를 만들던 어르신들의 안부도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제 더 이상은 ‘불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위치에 맞는 모음과 자음을 고르고 골라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냈다. 마치 씨줄과 날줄이 만나 한 면을 이루는 뜨개질처럼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고 그런 수고가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말의 조각을 골라내지 않는다. 쉽게(?) 쓰고 그보다 더 가볍게 지워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창조는 여전히 더디고 가 닿기 어렵지만 내뱉는 ‘말’만큼은 점점 빠르게 만들어진다. 가속에 익숙해진 나머지 줄이고 압축한다. 뜻을 잃어버려 금방 알아채지 못할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말을 고르는 시간은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르고 고른 말’은 여전히 필요하다. 말이 가진 고유의 특징 때문이다. 쉽게 휘발되지만 영영 지워지진 않는다는 것. 엉겁결에 받아 든 말 속의 ‘가시’는 목구멍에 걸려 꿀떡 넘어가지도, 쉽사리 빠지지도 않는다. 내던지고 싶지만 이미 보거나 들어버린 글과 말은 얼마나 힘이 센가. 눈을 질끈 감고 맨밥 한 숟갈 크게 삼켜보지만 눈물만 찔끔 나올 뿐 여전히 따끔거린다.


이런 때에 시인이 직조한 ‘고르고 고른 말’은 더욱 귀하다. ‘취기 어린 말’부터 ‘나대는 말’까지 내밀한 감정이 담뿍 담겼고 ‘억지로 삼킨 말’과 ‘털어놓는 말’엔 부끄러움을 무릅쓴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이 더욱 무서워진다. 통과의례 같은 쓰디쓴 말잔치 때문에 마음 번잡한 지인 생각도 많이 났다. 하지만 섣부른 위로의 말조차 아끼게 된다. 가늠할 수 없으면서 건네는 긍정의 말은 맹탕 같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저 실없는 농담을 던져본다. 잠시나마 그를 웃게 하는 것. 그것이 고르고 고른 나의 말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한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인데, 다른 생산적인 일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여전히 내 신경은 사태에 접착되어 있다. 그러면 또 자괴감이 든다. 왜 나는 거스러미에 집요한가. 왜 마음의 쓰레기봉투를 내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악취를 들이켜며 고통받는가.(…) 가렵고 마려운 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듯 뭔가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도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불가항력이다.(…) 작은 일에 마음을 쓰며 번민하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신경 쓰지 말라고 무심히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하자. 내가 신경 쓰는 게 아니고, 이것이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거라고. 내가 집요한 게 아니고, 이 사태가 집요한 거라고. 나에게는 이 손아귀에서 벗어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고르고 고른 말> 홍인혜, 창비 p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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