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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민소매

겨드랑이의 자유를 허하라


매년 여름 도전에 그쳤던 민소매 입기를 시작했다. 십여 년 전 과감하게 입고 나갔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찍힌 사진은 나에게 날카로운 기억을 남겼다. 다시는 예전의 영광을 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멀리했던 민소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를 놀라게 한 우람한 팔뚝이 그사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는지 묻는다면 그저 웃겠다. 그런 매직은 결코 쉽지 않아서 여전히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다면 내 팔뚝을 향한 다른 이들의 시선쯤은 신경 쓰지 않게 된 자존감의 결과일까? 그것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어쩌다 마주친 특별한 시선에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렇다면 십여 년간 억눌렀던 민소매 열망을 어떻게 시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히려 나이듦의 결과였고 투명인간이 되고서야 알게 된 자유였다.

      

<피프티 피프티>를 쓴 권혜진 작가는 20대일 때 마흔을 갓 넘긴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줌마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어. 사람들로 북적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더라고.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랄까...”

나도 이 느낌을 안다. 중년의 여성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 세상이 자취를 지운 것 같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언젠가부터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소외감을 일으켰다. 주목을 바라지 않았지만 잠시의 시선도 아까운 나이가 되었다는 건 꽤나 쓸쓸한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의 방향을 바꾸자 이것이야말로 기회가 아닌가 싶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니 내 맘대로 걸쳐도 되는 거였다.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그즈음 새로 운동을 시작하면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어본 것도 몸에 대한 내 생각을 변화시킨 계기가 됐다. 물론 레깅스와 브라탑을 입은 첫날 내가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 앞에 실루엣을 온전히 드러내는 건 또 다른 느낌을 가져왔다. 어쩌면 이다지도 곡선뿐인지, 수업 내내 곧 굴러갈까 걱정하며 거울 속의 나를 봐야 했다. 모두들 힐끔힐끔 보는 것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군살을 곱게 접어 넣고 싶었다.

     

하지만 몇 차례 수업이 진행되면서 수업 내내 내 몸에만 집중한 나를 알아차렸다. 내 엉덩이를 조이느라 분주했고 자꾸만 솟아오르는 어깨에서 힘을 빼느라 바빴다. 다른 이의 날개뼈와 엉밑살 사정은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의외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각종 외모 평가와 타인의 잣대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웬걸. 진짜 모두들 자신한테만 집중하기에도 버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부터가 그 증거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스스로 껴입었던 코르셋 하나를 벗어던진 듯 시원했다. 운동이 계속될수록 몸을 드러내는 게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단출한 옷차림의 자유함에 빠져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거리를 걷다가 건물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하지만 수업시간 내내 견딘 구력 때문인지 포동포동 제법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예쁜 민소매 원피스는 어찌 그리 많은지. 족히 10년은 포기했던 민소매 입기에 도전하자 선택의 폭도 활짝 열렸다. 팔 조금 덮던 천이 사라졌다고 얼마나 시원할까 싶겠지만 민소매의 화력은 겨드랑이의 자유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드나드는 바람은 축축해질 틈을 주지 않는 데다 영화 <색:계>에서 겨드랑이를 시원스레 뻗어 올리던 탕웨이가 된 것 같은 해방감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두었던 수많은 제한과 한계를 걷어내는 시도는 내 몸을 긍정하지 못했던 자기 암시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에서 이슬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몸이든 각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떤 몸이든 초라하다는 걸 알았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몸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더 자유를 준 게 모든 몸이 초라하다는 사실이었어요. 어차피 다 조금씩 예쁘고 초라하니까요.”

      

스스로 투명인간을 자처했다. 내 몸의 초라함과 육중함을 그대로 보아주지 못했다. 이것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스스로를 제한했던 자의식에서 나를 꺼내 주었다. 민소매를 입는다는 건 솔직해지려는 노력이며 감추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출렁거리는 팔뚝살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용기이고 다른 이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포이며 내가 좋은 건 눈치 보지 않고 시도하겠다는 변화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소매 아래로 쪽 뻗은 군살 없는 팔이 못내 부럽다. 그놈의 여리여리가 더 예쁘게 보이는 건 내 생각일까, 매스컴이 주입한 헛된 가치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통통한 내 팔도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권리는 충분하니까 기꺼이 그것을 보장하련다. 그러다 민소매마저 익숙해진 어느 날, 세월의 바람을 그대로 맞아버린 내 얼굴도 아무렇지 않게 SNS에 올려보고 싶다. 나이와 노화를 긍정하되 그 안에서 나를 가꾸는 것도 멈추고 싶지 않다. 세상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든 말든, 적어도 내가 먼저 나를 향한 핀 조명을 끄지는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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