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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계절 누리기

지금을 마음껏 즐기겠다는 다짐

      

여름을 싫어했다. 여름이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가 버거웠다. 나머지 계절을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가는 벌칙 같은 계절이라 생각했다. 여름이 싫은 이유를 꼽아보라면 끝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덥고 끈끈하고 빨개진 얼굴은 종일 뜨끈하고 그을린 자리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검은 그림자를 남긴다. 음식이 상할까 조심해야 하고 찬 음식이 연이어 들어가면 어김없이 탈이 난다. 더워서 산책도 못하는 데다 음식물 쓰레기 관리에 잔뜩 신경을 써도 날파리와의 동거는 피할 수 없으며 열대야는 또 어찌나 괴로운지... 여름이 싫은 이유는 매년 늘어서 5월에 들어서면 이 계절이 어서 지나길, 9월이 오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이랬던 내가 여름도 꽤 괜찮은 계절이란 생각을 올해 처음으로 했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만난 여름 바다 덕분이었다. 그동안은 파라솔 하나 간신히 빌려놓고 목욕탕 같은 바다에 겨우 몸을 담가보는 피서 같지 않은 피서에 질려 있었다. 더위를 피해 더 더운 곳을 찾아가는 여름휴가를 ‘피서’라고 하다니. 진정한 피서는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라는 생각으로 여름휴가 없이 지낸 지 오래였다.      


진짜 여름을 만난 그날도 동해 어디쯤의 시원한 카페에 앉아 먼바다를 구경만 할 마음으로 가볍게 떠났다. 시원한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서늘한 카페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더위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아이스커피 한 잔까지 더해지자 싸늘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서 창밖에 쏟아지는 태양의 온도가 가늠되지 않았다. 냉방병에 걸린 듯 오들거리는 몸을 좀 데워볼까 싶어서 모래사장으로 다가갔다. 한창 피서철인데도 어쩐 일인지 해변엔 우리뿐이었다. 곧 햇빛 아래 드러난 살갗이 따가워졌고 발가락을 파고드는 모래에 발이 데일 것 같았다. 피부를 통해 스며든 여름의 열기는 빠르게 몸속으로 전달되면서 내장까지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끈한 바닷바람은 뜨거워진 얼굴을 더욱 달궜다. 해변의 고즈넉함에 마음을 빼앗겨 그 시간을 잠시 견뎌보기로 했지만 숨 쉴 때마다 더운 바람이 몸속에 가득 찼다. 그런데 바깥 기온이 내 몸의 온도를 넘어선 어느 시점에 도달하자 땀이 맺히면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모래 속에 익어버린 발 끝에 닿은 바닷물은 그 어떤 얼음물보다 차가웠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느껴지는 시원함이라니.

      

뜨거운 햇살과 찌는 듯한 바람에 온몸을 푹 담가본 뒤에야 여름 더위가 오히려 좋아졌다. 너무 정열적인 친구의 에너지가 버겁다며 피했는데 막상 함께 지내보니 그 화끈함에 매료됐다고나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계절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본’ 그날의 경험은 계절이 보여주는 맨얼굴을 선물처럼 마주하게 해 주었다. 그날의 감각은 모든 계절의 얼굴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부푼 계절감은 일상을 더욱 풍부하게 채웠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계절을 누리기 위해 태양과 바람 속으로 나갔고 그 덕분에 산책이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뭇잎과 꽃의 이름을 검색하며 이름 모를 세상의 많은 존재를 알아채게 되었다.         

계절이 깊숙이 삶에 들어오자 내가 꾸려가는 일상의 모양도 달라졌다. 삶과 맞닿아 있는 계절의 면면을 좀 더 살갑게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지만 20년 넘게 ‘살림’이란 걸 했으면서도 제철 채소와 먹거리를 제대로 챙기진 못했다. 잘 알지도 못했고 바쁜 일상에 치여 알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동지 팥죽, 대보름 부럼, 초복 삼계탕 같은 것을 그저 귀찮게 생각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 농경사회도 아닌데 바쁜 현대인에게 챙겨야 할 과제를 자꾸 주는 것 같았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누군가에겐 부담이 되는 게 아니냐며 나름 일리 있는 근거를 대면서 삐딱하게 생각했다. 챙길 수 있으면서도 세시풍속에 항의하듯 모른 척 넘어간 적도 많았다. 소홀해지고 싶어서 홀대했던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진 않았다. 다만 올 초복에 삼계탕을 먹으면서 때에 따른 먹거리의 효용을 실감하게 됐다. 쉽게 지치고 속이 허한 느낌이 들던 참이었다. 평소 찾아 먹던 음식이 아닌데도 몸이 음식을 부르기라도 한 듯 내 손으로 생닭을 손질하고 갖가지 한약재를 넣어 공들여 끓여냈다. 뜨끈한 국물을 한 입 삼키자 뽀얀 에너지가 열기가 온몸을 타고 돌았다. 순전히 기분 탓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한 감각이었다. 때에 따라 충족해야 할 먹거리, 자연과 하나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기운이 원하는 제철음식이란 건 분명 존재했다.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의 몸은 때마다 원하는 것이 있었다, 계절에 따라 수축하고 이완하는 몸을 느끼고 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계절을 살아낸다는 건 몰랐던 나와 주변을 살피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추희 자두와 초록 사과를 충동적으로 샀다. 식구 중에 나 혼자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한 꾸러미를 혼자 먹는 게 버거워서 매해 포기했었다. 이번엔 먹다 지치면 갈아서 주스라도 해 먹으리라 마음먹고 집어왔다. 그런데 과일 꾸러미를 보고 딸이 반색했다.

“어, 너 이거 좋아해?”

“엄마 기억 안 나? 옛날에 자두 사놓으면 내가 반은 먹었잖아. 초록 사과도 먹고 싶었는데 잘 됐다.”


23년이나 같이 살아온 딸의 과일 취향이 이렇게나 새삼스러울 줄이야. 내 기억은 매일 어디로 도망이라도 가는 걸까? 딸이 자두를 먹던 장면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지만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딸의 반색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자두와 사과를 뽀득뽀득 닦아 큰 접시에 담아놓으니 보는 것만으로 여름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을, 커다란 꽃다발 같았다. 과일 접시를 가운데 두고 딸과 함께 커다란 자두를 베어 물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과즙을 핥으며 끈끈하고 새콤달콤한 여름을 온몸으로 맛봤다. 그렇게 조금씩 계절 누리기를 시작했다. 1월부터 12월까지 나오는 제철 채소와 해산물을 기록하고 한 번쯤은 챙기려고 노력했다.

      

여름이면 수분 가득한 수박과 새콤한 자두가 당기고, 겨울이면 뜨끈한 고구마와 가슴 쨍한 동치미가 당기는 건 우리 몸이 자연을 부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속에 자연의 기운을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비닐하우스 덕분에 한겨울에도 수박을 맛볼 수 있지만 한 여름에 먹는 물기 가득한 커다란 덩이와는 다른 기운을 얻게 된다. 제철채소와 과일이란 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되었지만 딱 그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딱 그때만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모아 키워낸 것을 우리는 때에 맞춰 맘껏 즐기면 된다. 자연이 주는 제철 선물을 놓치지 않기. 오십이 되어서야 시작해본다.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속속들이 느끼다 보면 시간도 좀 더디게 흐르지 않을까 하는 괜한 기대도 품어본다.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로 주어지는 유한한 시간을 긴 호흡으로 기억하는 데 이만한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땅의 기운을 흠뻑 머금은 달래와 냉이로 봄을 깨우고 햇양파로 피클과 장아찌를 담아 봄을 가둬둔다. 어린 깻잎순과 늙은 오이 노각이 나란히 상에 오르고 툭 벌어진 무화과의 요염한 단맛에서 아찔한 여름을 누린다. 단단한 밤을 끓이고 끓여 보드라운 보늬 밤을 만들면 어느 계절에서든 가을을 맛볼 수도 있다. 겨울의 팥빙수와 여름의 콩국수를 챙기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낮밤과 그림자의 길이를 느끼며 계절의 순서를 따라가 본다.       

그렇게 여리고 신선한 봄을 지나 모든 것을 집어 삼길 듯 뜨거운 여름 열기를 만난다. 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남은 계절을 맞이하는 가을을 지나면 모든 생명이 땅 속으로 파고들어 다음 봄을 준비하는 겨울이 다가온다. 사계절은 인생의 다른 말. 계절에 온전히 몸 담그고 살아내는 건 인생의 한순간을 민감하게 살아내는 것과 같다. 나의 계절이 어디에 있든 활력 가득했던 지난봄과 여름을 그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없을 내 인생의 가을을 흠뻑 누리는 마음밭이 되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모든 자연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고 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 다가올 모든 계절이 마지막인 듯 그 계절의 선물 같은 풍경과 맛을 야무지게 챙겨보리라.  에너지 가득한 친구의 모습을 매년 놓치지 않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나 이번 계절은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제철을 누리는 마음은 나의 지금을 마음껏 즐기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계절마다 내어놓는 최선의 자연을 흠뻑 안아보는 것, 계절 누리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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