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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이름 껴안기

'정희'는 아빠의 흔적

     

내 이름에 불만 없이 살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에 대해 만족인지 불만인지 평가해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무는 그저 나무일뿐 왜 나무라고 이름 지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적당히 단순한 어린이였다. 학창 시절에 정희란 이름은 익명성을 보장하는 평범한 매력이 있었다. 출석부에서 도드라지지 않는 이름은 마치 무기와 같아서 수많은 위기를 피해 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내 이름을 열렬히 좋아했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가을’이나 ‘물결’ 같은 특별한 이름을 동경한 순간도 많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동경한 건 단지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 이름에서 묻어나는 친구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의 긴 배움과 남다른 식견까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를, 정확히 말하면 아빠를 얼마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가구점을 운영하던 아빠의 허름한 옷차림과 피곤에 지쳐 거칠어진 모습이 어린 눈엔 창피했다. 그래서 단정한 옷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친구들의 아빠를 오랫동안 부러워했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아빠는 철제 책상을 어깨에 이고 5층 빌라에 배달하면서 억척스레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당신을 부끄러워하는 딸에게 모든 것을 베풀었다.    


아빠에 대한 부끄러움과 별개로 나는 스스로에게 대해 꽤 자신만만했다. 부모의 울타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내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내 모습 중 무엇 하나 부모를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부모보다 더 나은 미래를 낙관했고 나의 근원을 능가했다는 자만에 사로잡혔다. 그럴수록 아빠에게 받은 내 이름이 나와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좀 더 특별한 이름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던 것 같다. 평범한 이름보다 나 자신의 독특함이 드러나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락없이 중증 사춘기병에 빠진 소녀였다.     


하지만 이 모든 상념도 지금에서야 돌아본 그때의 모습일 뿐, 어린 시절의 나는 평생 따라다니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곧을 정과 빛날 희, 곧고 빛나게 살면 되나 보다 여겼던 단순 그 자체였다. 그런 내게도 이름에 얽힌 좋은 기억은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그 첫 기억은 고등학교 때 연세 지긋한 수학 선생님께 들은 덕담이었다. 출석부를 쭉 둘러보던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이다음에 잘 살 이름’이라고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아서 더 뜬금없었고 그래서 유독 진한 잔상으로 남았다. 처음으로 내 이름 자체를 각성했기 때문인지, 그 덕담 후에 칠판에 나와 문제 풀어보라고 했던 아찔한 기억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 좋은 이름을 가졌구나’라는 좋은 기억을 남겼다. 그것은 내 이름의 근원이었던 아빠에 대한 부끄러움을 조금은 희석시켜주었고 남들은 알지 못할 내 안의 어떤 열등감을 희미하게 해 주었다.

     

학창 시절엔 학년과 반, 전공과 학번이란 또 다른 이름 뒤에 얼마간 숨을 수 있었지만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하자 이름은 나를 대표하는 나 자체가 되었다. 그전보다 훨씬 자주 불렸고 언제 어디서든 나와 동일시되었다. 그렇게 이름이 부각될 때마다 내 이름이 낯설고 어색했다.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즈음 이름과 관련된 기사 하나는 내 이름에 대한 불만을 더 키웠다. 전국 공무원의 이름을 종합해 본 결과에 대한 기사였는데(이런 조사는 왜 한 걸까?) 당시 여성 공무원 중 1위를 차지한 이름은 바로 김정희도 문정희도 아닌 이정희였다. (참고로 남자 공무원 이름 1위는 김영수였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성까지 전국 1위를 차지하다니. 이쯤 되면 성도 이름도 평범을 넘어 지나치게 버거운 사랑을 받은 나머지 대명사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유명사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은 바라지도 못할 평범 중에 평범을 대표한 기분이었다. 병원이든 은행이든 본인을 확인해야 하는 곳에 가면 수많은 이정희가 득실거려서 생년월일까지 밝혀야 하는 것도 성가셨다. 그 수학선생님 말처럼 내 이름엔 하늘의 운과 복이 담겼을지 모른다는 설레발과 그만큼 좋은 이름이니까 많은 이가 선호했을 거라는 합리화로 이름에 대한 불만을 무마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못마땅한 순간마다 아빠에게 불만 섞인 투정을 늘어놓았다.


“아빠는 뭐 이렇게 고민 없이 딸 이름을 지었대?”

“네 이름이 어때서. 아빠가 돌림자 안 쓰려고 얼마나 공들여지었는 줄 알아?”

“돌림자 썼으면 뭐라고 지었을 건데?”

“계희”

“.......”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하면서는 그나마 불만스럽게 여겨지던 정희라는 이름도 내 뒤로 쓱 숨어버리고 새아기와 누구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리고 얼마간은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쓰리콤보를 해내느라 이름에 대한 감각도 잊고 살았다.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며 내 이름이 유독 회자되던 때도 있었지만 내가 무엇이라 불리든 별 상관없는 시기였다. 그저 한창 크는 아이들 돌보느라 바빴고 단절된 경력을 이어 줄 일을 모색하느라 분주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시동생이 결혼하면서 내 이름에 대한 각성이 또 찾아왔다. 누구 엄마로 불리는 나와 달리 동서는 처음부터 이름으로 불렸다. 맏며느리와 작은며느리를 대하는 시댁 식구들의 심정적 차이일지 모르지만 시부모님을 시작으로 시누이들까지 그 호칭을 따라가자 이름이 불리는 사소한 타이밍마다 신경 쓰였다. 나와 동서가 나란히 불릴 때마다 사소했던 거리감이 차츰 늘어났다. 그럴수록 평범한 이름이 못마땅했다. 내 이름이 좀 더 예뻤더라면 나도 다정하게 이름으로 불렸을까? 싶은 옹졸한 마음도 스몄다. 시댁의 대소사를 맡을 맏며느리라는 역할만 떠맡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온 식구가 모이는 시댁 행사 때마다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서먹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 이름이 더 못마땅해져서 아무 잘못 없는 이름에게 화풀이하듯 개명을 알아보곤 했다. 한층 간편해진 신청절차와 과정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어떤 이름으로 할지 후보를 적어 넣을 때마다 신이 났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거다’ 하는 느낌을 주는 게 없었다. 이 이름은 이래서 싫고 저 이름은 저래서 싫었다. 십수 년 전 수학선생님께 무심히 받아 든 이름에 대한 칭찬이 떠오르면서 괜한 일을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간 불러준 이름의 기운이 내 인생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럼에도 이따금 독특하고 멋진 이름을 만날 때면 이참에 확 바꿔버릴까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일 뿐 돌고 돌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돌고 돌던 개명의 유혹은 몇 년 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싹 사라졌다. 아빠가 지어준 이름도 유산이라면 유산일 테니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고 싶어진 것이다. 아빠가 세상에 남긴 사소한 흔적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산산이 흩어져 희미해진 아빠의 자취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육신은 사라져도 기억 속에선 아직 살아있다는 듯 내 이름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리라 마음먹게 됐다. 무엇으로 불리든 아빠의 딸로 살아온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내 이름을 지어주던 아빠의 바람처럼 이제껏 무수한 다행을 마주하며 살아냈으니 말이다. 뒤늦게 아빠를 껴안듯 내 이름을 껴안아본다. ‘정희야’ 다정하게 부르던 아빠의 목소리를 무엇으로 대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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