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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하라하치부

이것으로 충분한 마음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단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캐릭터 채송화는 유독 밥상 앞에서만 이성을 잃는다. 오빠 셋에게 음식을 빼앗기며 살아온 과거를 만회라도 하듯 불판 위에 올린 고기가 익을 틈도 없이 전투적으로 먹는다. 보다 못한 친구는 식사 전 외울 주문을 만들어준다. “이거 다 내 거다. 이거 누가 안 뺏어먹는다.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음식을 씹을 줄 안다...” 그저 주문일뿐인데 읊기 전의 채송화와 후의 채송화는 달라졌다.      

나 역시 누구보다 빨리 먹고 무엇이든 잘 씹지 않는 습관을 가진 터라 그 주문이 귀에 콕 박혔다. 나도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고 밥상 앞에서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워보았다. 하지만 뜨겁고 시원한 음식 앞에서 읊기엔 너무 길어서 이내 잊었다. 그러다 ‘하라하치부’라는 작고 귀여운 단어를 만났다. 일본 오키나와의 장수 노인들이 즐겨 쓰는 말로 배가 부르기 전에 젓가락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였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겐 평생 실천해야 할 건강 신념으로 통했다. 위가 80% 정도 찼다고 느껴지면 그만 먹는다는 식사 원칙 덕분인지 세계적인 장수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길고 긴 채송화의 주문을 대신할 다섯 음절 단어를 얼른 일상으로 끌어왔다.  

    

장수 노인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오래 살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적으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건강을 소망한다. 그러려면 일단 내 한 몸 거두기가 수월해야 한다. 걷거나 앉고 일어서기, 쭈그리고 앉아 발톱 깎기, 혼자서 등 밀기 같은 일상의 몸짓이 버거워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득 채우지 말아야 한다. 내 주먹만 한 위는 도라에몽 보따리처럼 내가 담는 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늘어날수록 몰려오는 가짜 허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식사와 식사 사이에 적당한 배고픔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릇되게 먹어서 아프고 너무 먹어서 죽는다.  

       

식사 중에도 하라하치부를 자주 떠올린다. 배부름은 늘 뒤늦게 찾아와서 80% 지점을 자주 놓치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채송화처럼 나 역시 하라하치부를 떠올리기 전과 후가 달라졌다. 비단 먹는 태도와 양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가득 채우려는 욕심이 일상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과로와 과식, 과음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과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데 넘쳐야 풍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박하다고 치부한다. 욕심을 이기며 수저를 내려놓고 적당한 지점을 정확히 알고 채워가는 삶은 무리할 수가 없다.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의 비상사태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남겨두는 지혜는 일상의 모든 면을 가다듬어 준다. 여지를 남기는 것,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자족감에서 진정한 만족은 시작된다.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가기보다 살살 달래고 돌보는 사이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이 채소일 수도, 잠깐의 휴식일 수도, 긴 시간의 잠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찾아낼 시간과 여유를 주어야 하며 그것은 오히려 제한과 단절 속에서 명료해진다.      


100세가 넘었음에도 매일 글쓰기와 강연을 이어가는 김형석 교수는 “하루에 내가 쓸 수 있는 힘의 양이 100퍼센트라면 90퍼센트만 쓰고 10퍼센트는 남겨두자는 마인드로 여태껏 일을 해왔어요”라고 말한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등단 27년 차 김영하 작가 역시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본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이라 말했다. 인생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능력과 체력을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새롭게 발레를 배우며 에너지의 여백이 주는 힘을 실감하게 됐다. 50분의 루틴이 견딜만해지자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어김없이 달라붙었다. 5시간처럼 느껴지던 50분이 ‘고작’ 50분으로 변하자 전문 발레학원의 70분 수업이 궁금해졌다. 탄력이 붙었을 때 진도와 함께 내 몸도 쭉 늘려봐야겠다 싶었다. 때마침 집 근처에 발레학원이 새로 오픈했다. 고작 50분이지만 몇 달을 꼬박 다녔으니 전문 학원 수업도 쉽게 적응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매트 운동 10분 만에 무너졌다. 매트 운동은 주로 발레 동작을 위한 근력운동으로 진행되는데 문화센터 수업이 50분 중에 20분 정도를 매트 운동에 쓴다면 전문 발레학원에선 거의 40분을 매트 운동에 할애하는 데다 그 강도가 비교불가였다. 복근 운동만 보더라도 문화센터 수업에선 윗몸일으키기 위로 8번 오른쪽으로 8번 왼쪽으로 8번 다시 위로 16번이라면 발레 학원에선 그걸 몇 세트 반복한 다음 다리 들어 올리기, 엎드려서 들어 올리기, 그 상태로 버티기가 추가됐다.

      

첫날부터 어김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체력의 한계를 넘었다 싶으면 바로 빨간 등이 켜지는 것 같았다. 결국 수업 중간에 뒤로 빠져서 다른 분들의 나머지 루틴을 참관했다. 그 뒤로 문화센터에서 적응하던 때를 떠올리며 꾸역꾸역 참여 시간을 늘려갔다. 다행히 조금씩 익숙해졌고 허리와 다리에 힘이 붙는 느낌이 확실히 생겼다. 발레 동작도 조금씩 그럴싸해지는 느낌적 느낌에 속아 당장의 힘듦은 좀 참아내기로 했다.

      

그렇게 점차 적응하나 싶었지만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문제는 남았다. 도무지 즐겁지가 않은 것이었다. 문화센터 발레 수업은 자세가 안 나와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힘들어도 다음 주가 기다려졌는데 전문학원 수업은 향상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다음 수업일이 다가오면 긴장되고 초조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진 채 수업을 버티다 보니 끝나는 시간에서 1분만 늦어져도 짜증이 났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할 순 없었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열심히 하리라는 욕심이 20% 여지에 담긴 즐거움을 빼앗아 간 것이다. 처음 마음을 떠올렸다. 나는 발레리나가 되려던 게 아니었다.            


하라하치부는 인간관계에 적용했을 때도 힘을 발휘한다. ‘세상에 열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면 7명은 내가 좋든 나쁘든 별로 관심이 없고 2명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싫어하고 1명은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좋아한다.’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몹시 공감하면서도 나만큼은 예외이길 바랐다. 열 명의 사람 모두에게 늘 칭찬 듣길 원했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소망한 셈이다. 그 소망은 나를 타인의 잣대에 맞추게 만들었다. 인정 욕구에 이끌려 다니며 나를 좋아하지 않는 20% 사람들에게 막강한 힘을 허락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은 이미 가진 것에 집중하는 마음이다. 먹지 못한 20%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뱃속을 채운 80%에 주목하는 삶이고 나를 싫어하는 2명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8명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감당 못할 20%까지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우고 조여주는 80%에 열정을 다하는 삶이다. 그런 일상이 하라하치부를 만든다. 이만하면 됐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무리하지 않게 한다. 필요 이상으로 주었던 힘을 슬그머니 빼면 그 자리에 만족이 자리를 깐다. 조용히 되뇌기만 해도 마음 한켠은 이미 충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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