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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Nov 08. 2022

김강민 홈런

행운의 여인쯤은 되는 것일까



어제 저녁 한국시리즈 5차전을 혼자 집에서 보았다. 남편과 딸은 구 문학경기장 현 랜더스필드로 출동했다. 네 식구 중에 나만 야구를 덜 좋아해서 함께 가지 않았다. 아이들 어렸을 땐 마지못해 함께 가곤 했는데 곧 지루해져서 책도 꺼내 읽고 애들 학습지 채점도 하면서 야구장 먹거리만 실컷 즐기다 왔다. 이젠 아이들도 다 컸고 이번 경기는 티켓도 금방 매진되는터라 나는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어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데 참 이상하게도 내가 보고 있으면 SSG이 상승세를 타는 잦은 우연 때문에 남편과 딸의 간곡한 부탁대로 일단 거실 TV를 켰다. 푸릇푸릇한 청년 때부터 응원해온 김광현 선수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좋은 출발에 안심하며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이것저것 밀린 문서 작업을 했다.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지만 슬쩍 볼 때마다 김광현 선수의 흔들리는 동공과 수비 실책이 이어져서 안타까웠다. 그때를 잘 파고든 키움은 야무진 경기 운영으로 거듭 점수를 내고 있었다.      


‘엄마 경기 보고 있는 거지?’ 딸에게 톡이 왔다. 뜨끔해진 나는 문서 작업을 서둘러 끝내고 약속대로 거실 소파 중앙에 앉았다. 질 때 지더라도 남은 경기는 제대로 봐야 딸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옮겨 앉기 무섭게 최정이 홈런으로 2점을 냈다. 이거 정말 우연인 걸까? 내가 무슨 승리의 여신도 아니고... 하지만 나머지 출루 타자가 가뭄에 콩 나는 상황이라 공수 교대, 여전히 4-2 상황이라 이렇게 지는구나 반쯤 포기했다. 어렵게 티켓팅 성공해서 오랜만에 직관하러 간 남편과 딸이 속상해할 걸 생각하니 좀 안쓰러웠다. 게다가 비는 왜 또 갑자기 그렇게 오는지...

      

그런데... 9회 말 최주환 선수가 투수와 끈질긴 견제 끝에 출루에 성공, 무사 1,3루를 만들어냈다. 다음은 김강민 선수가 대타로 나섰다. 위기의 순간에 강한 한 방으로 팀을 구하는 선수이긴 해도 어떻게 번번이 그러겠는가. 게다가 오늘 경기는 야구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키움으로 확실히 기울어 있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김강민! 끝내기 홈런!”을 연호했고 어떤 젊은 여성은 “오늘 제 생일이니 홈런을 선물로 주세요”라고 쓰인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며 기대와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김강민 선수는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고 이제 공 하나만 남긴 상황을 마주했다.      


모두의 긴장 속에 던져진 세 번째 공, 경쾌한 땅 소리 후 김강민 선수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쓰리런 끝내기 홈런. 나도 모르게 우와와아아아 소리와 함께 기립박수를 쳤다. 야구는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집에 도착한 남편과 딸은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하이라이트 채널을 찾아서 감동을 곱씹었다.

     

그러다 김강민 선수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쓴 건 모두 그 인터뷰 때문이다. 어떤 생각으로 타석에 섰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김강민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시즌 테마는 ‘한 타석’이었어요. 그 한 타석 한 타석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 ‘한 타석’이란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1982년생. 마흔이 넘은 나이. 언제 나설지 모르는 한 타석을 위해 신체와 정신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체력과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에 임한 매일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몸 상태를 달래가며 흘린 땀방울은 때론 배신하기도 하는 법. 하지만 김강민 선수는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김강민 선수의 역사를 들어보니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역시 끝까지 자신을 던져보면 무엇이라도 쥐게 되는 것일까.

     

최주환 선수의 끈질긴 근성 뒤에 감춰진 수많은 스윙과 키움 선수들의 기량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오늘 저녁 6차전이 시작된다. 이번 경기로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릴지 한 경기를 더 볼 수 있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과든 두 팀 선수와 감독 코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 노력을 반드시 알아준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TV 앞에 앉아 지금까지의 확률이 맞는지, 행운의 여인쯤은 되는지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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