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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제노바를 떠나는 새벽은 혹독했다. 싸늘한 바람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가장 가혹한 점은 버스 정류장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노바는 집과 건축물들이 상당히 오래되어 과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오래된 만큼 길이 복잡하고 골목길이나 샛길이 많아 제노바를 더 좋아하게 된 매력이었는데 떠나는 날 발목을 잡을 줄 알았으랴. 스마트폰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정류장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았다. 약 50미터 안에 정류장이 세 곳이 있었는데 가는 방향으로 계산하였을 때 한 곳은 반대쪽이었으니 두 곳 중에 하나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비를 맞으며 두 정류장의 정가운데 서있기로 했다. 한쪽에서 버스가 보였고 전속력으로 뛰어가 제노바로 향하는 것임을 확인한 후 탑승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베로나로 향하는 길은 이리도 험했던 것이다.


힘들게 탄 버스, 비로 젖은 옷과 가방, 거친 호흡.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옆자리에 사람이 없어 넓은 공간에서 정신없는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젖은 외투를 대충 구겨 넣고 뽀송뽀송한 티셔츠와 양말을 갈아 신자 그제야 새벽의 졸음이 쏟아진다. 한 번도 깨지 않고 눈을 뜨니 베로나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엿보기 위해 도착한 이 도시. 잠시 음악을 듣는다.


‘줄리엣, 호! 영혼을 바칠게요’


노래가 아무래도 도시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아 서둘러 껐다. 버스가 도착했고 일어서려는 찰나 창 밖의 풍경에 잠시 앉게 되었다. 두 가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는데 하나는 공원을 끼고 펼쳐진 예쁜 건물들이었다. 그다음은 버스에서 내린 엄청난 수의 커플들이었다. 잠시 앉아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모든 이들이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걷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혼자 여행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도 로미엣과 줄리엣의 도시에서 순도 100%의 커플들을 보니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힘을 내고 일어나 버스 기사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버스는 어디까지 가나요?”

“베네치아”


마침 베로나 다음에 방문할 도시였다. 베로나에 내리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자리에 돌아가 앉아 다시 커플들을 감상한다. 그들은 모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꽃과 나무로 차린 진수성찬 앞에 젓가락 같이 어울리는 짝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짜장면 앞 숟가락처럼 어색할 것 같았다. 미련이 생길 틈도 주지 않게 버스가 곧장 출발한다. 그렇게 로미오가 아닌 나는 베로나를 쉽게 포기해 버렸다. 좋은 숙소를 예약했었기에 비싼 숙박비가 날아갔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것에, 그리고 내가 이곳을 곧장 떠나는 것에 만족한다. 다음에 줄리엣과 다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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