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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Mar 14. 2022

이 전시는 여러분의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리뷰

이 전시는 여러분의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드디어 서울시립미술관(SeMA)을 다녀왔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상경한 시골쥐에게는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는 긍정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현재 SeMA에서는 한국과 호주가 함께 준비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가 전시되고 있다.(3주 전 작성한 글이며, 전시는 3월 6일부로 마무리되었다.) 

 2021년이 호주와 수교를 맺은 지 60주년이 되던 해여서 2020년부터 준비를 해온 전시였는데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아 이제야 전시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이 전시를 위해 오갔을 담당자들의 소통에 진심으로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는 호주 원주민의 입장이 되어 지금의 호주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전시였다. 전시명 그대로 제국주의 하에서 영국이라는 강대국의 역사로 구성되어있던 호주로 향하는 경로를 완전히 재탐색하게 된 것이다.


 학창 시절에 "영국의 범죄자들을(진짜 범죄자라기 보단 정치적, 종교적 숙청 대상자들) 유배 보냈던 장소가 호주였기에 지금도 백인들이 인구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배웠던 걸로 기억되는 걸 보니 역시 역사는 승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치 무어(Archie Moore)의 <연합 국가>


 전시가 시작되는 로비에는 호주의 현대미술작가 아치 무어(Archie Moore)의 <연합 국가>가 설치되어 있다. 14개의 호주 원주민 부족의 국기(깃발)를 구글어스를 기반으로 만들었는데, 부족의 지형적, 문화적 특징을 반영하여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는 영국이 호주를 토착 언어를 중심으로 통합한 식민 계획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면 호주의 작가들이 그린 회화작품과 설치작품들이 이어진다. 특히 로마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를 호주의 황토를 사용하여 원주민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외형은 물론 입고 있는 의복 또한 정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양식이 아닌 호주 토착민들의 전통 의상으로 그림으로써 '서양의 문화와 호주 원주민들의 역사를 동일시해달라'는 작가의 의도가 잘 반영 되어 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위 작품은 호주에서 서식하는 동물의 가죽을 가공한 작품이다. 동물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공중에 매달아 놓았는데, 전시장엔 동물의 가죽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실은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호주 원주민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반대쪽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면 꽃과 풀들이 그려져 있는데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식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대륙'이라 영국인들은 공표했지만, 호주는 원래 인간, 동물, 식물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구대륙'이었음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영국은 호주를 향해 'Terra Nullius'라 지칭하며 무주지를 발견국의 영토로 하는 국제법에 따라 호주를 영국의 영토화했다. 호주의 원주민은 이러한 영국의 제국주의에 의해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로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치부되어 철저히 경로에서 삭제되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영국의 지배하에서 원주민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으나 영국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영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부색의 정도에 따라 백인 가정에 강제 입양 보내거나, 기숙학교에 강제 입학시키며 원주민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작지만 강하게 있어왔다. 이번 전시는 호주 예술가들이 예술로써 침략자에 저항하는 모습을 간접적이지만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통쾌한 전시였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특히 전시 가장 마지막에 닿을 수 있는 섹션에는 영화 한 편이 재생되고 있는데, "수준 높은 저항이란 이런 거구나"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영화의 제목은 'Terra Nullius'를 비꼬아서 <Terror Nullius>로 지었다.

 제국주의가 호주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무주지에 대한 점유권을 용인해주었던 국제사회의 법'이 아닌,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행위를 합법화해준 국제사회의 법'이라는 뜻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말미에는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호주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호주의 생일은 다름 아닌 1788년 1월 26일 영국 1함대가 영국계 이민자들과 함께 호주에 상륙한 날을 뜻한다.

 이건 마치 일본의 왕이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을 한국의 생일이라며 축하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Australia Day'로 불리는 1월 26일을 호주의 원주민들은 '추모의 날', '침략의 날'로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이번 전시를 보고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비록 호주가 영국의 총칼 앞에 오랜 기간 지배당했지만, 온전히 그들의 주권을 찾을 수 있는 힘은 펜으로 대변되는 예술에서 나올 것이다.


 호주 원주민들의 언어 그룹을 모아 깃발을 만들고, 호주에 인간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패총을 발굴, 예술 작품화하며, 교황의 얼굴을 원주민의 피부색으로 의복을 원주민 의복으로 그려내고, 원주민들이 먹었던 음식을 유리 공예로 빚어내며, 영국인들이 강제로 입양 보낸 혼혈아이들의 초상을 그림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작품들


 이것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호주의 역사는 1788년부터 시작되어 이제 230년이 조금 넘은 거짓 역사가 아닌,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유규한 역사로 다시 기록될 것이다. 말 그대로 호주의 '경로가 재탐색' 될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간단히 전시 리뷰를 작성했지만, 일이 바쁘다는 게으름의 가장 좋은 핑계 뒤에서 브런치에 너무 늦게 전시 리뷰를 업로드하게 되었다. 전시가 이미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이유를 찾자면, 이제 다시 전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글이 누군가에게는 전시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창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전시 리뷰는 이렇게 마무리하며, 또 다른 전시가 나를 울리고 성장시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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