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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Dec 31. 2020

61. 안녕 다정한 사람

HugoBooks_우고의 서재

61. 안녕 다정한 사람


 <안녕 다정한 사람>은 KBS 뉴스광장 앵커이자, <따뜻한 냉정>, <치유의 말들>의 저자인 박주경 작가님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다. 


 "제가 즐겨보던 여행 에세이집입니다. 정 작가님께 더 어울릴 것 같아 낡은 책이지만 보내드립니다." -박주경-


 새로운 책을 구매해서 선물하는 것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선물하는 것을 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는 내게는 가장 감사하고 또 행복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주경 앵커님의 편지와 사인


 <안녕 다정한 사람>은 개성 넘치는 10명의 인물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가 은희경의 '호주'부터 영화감독 이명세의 '태국', 시인 이병률의 '핀란드', '노르웨이', 소설가 백영옥의 '홍콩', 소설가 김훈의 '마크로네시아',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요리사-에세이스트 박찬일의 '일본', 뮤지션 장기하의 '런던', 소설가 신경숙의 '미국', 뮤지션 이적의 '캐나다'까지 익숙한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나라와 도시들이 서로 다른 입을 통해 이야기된다.


 




Ⅰ. 소설가 은희경


 소설가 은희경의 이야기는 호주의 '와이너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직 와인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고 풍미에 대한 이해는 낮지만 와이너리 탐방은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여름에 떠났던 미얀마 여행에서 와이너리를 방문할 기회를 잡았지만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좌절된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크다. 10명의 여행 이야기 중 가장 좋은 문장을 하나씩 뽑아서 소개하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에 인쇄된 모든 문장을 옮겨 써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비행기로 열 시간, 그런데도 호주와 한국의 시차는 한 시간밖에 나지 않았다. 지도에서 볼 때 가로로 이동한 게 아니라 세로로 아래를 향해 내려왔던 것이다. 시간이란 세계를 세로 방향으로 나누어 정한 것이다. 시차가 곧바로 거리차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통념이 깨지는 것도 여행의 신선함 중 하나이다. 생각이든 몸이든,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섦을 찾아 떠나는 것이니까. 남반구, 겨울의 와이너리, 호주에만 있는 야생동물들, 대륙의 하늘,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여행이란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올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멀어진 거리만큼 되돌아오는 일에서 나는 탄성을 얻는다. 그 탄성은 날이 갈수록 딱딱해지는 '나'라는 존재를 조금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함부로 혹은 지속적으로 잡아당겨지더라도 조금쯤은 다시 나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은희경 작가의 문장이 여행의 아름다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여행이란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 하여 돌아올 거리를 만드는 일' 너무 멋진 표현이다. 나는 언제쯤 이런 명문을 쓰게 될 수 있을까.




Ⅱ. 영화감독 이명세


 영화감독 이명세는 영화 <미스터 케이>의 무대인 방콕을 방문했다. 태국 그리고 방콕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은 '아, 방콕이 정말 아시아의 중심이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이명세 감독은 이야기한다. 나는 아직 태국을 가보지 못했다. 경유로 공항에만 잠시 머물러 보았을 뿐. 태국은 내 주변 많은 이들의 원픽 여행지다. 무엇이 그들이 그곳에 매료되었는지 꼭 한 번 느껴보고 싶다.


 "미니어처 폭포 앞에서 생각이 오락가락하는데 한 가족이 결코 물도 맑다고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단란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파리들이 먹는 음식 위에 앉으려 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휘이- 손을 내저어 내쫓는 사람이 없었다. 문득 일체유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에겐 파리가 더러운 해충이겠지만 저들은 파리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 것이리라. '파리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 나눠 먹지.' 그렇지 않고 뜨거운 햇볕 아래서 네 편 내 편 가르며 있다면 삶은 얼마나 고단한 것이겠는가."


 미얀마 여행을 할 때였다. 미얀마 가정식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벌레였다. 떨어지는 벌레는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나는 비위가 정말 강한 편인데,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주변을 보니 미얀마인 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맛있게 밥그릇을 비워나갔다. 과연 내가 그들의 식문화를 보며 더럽다고 혐오의 표현을 할 권리가 있을까. 더 깨끗한 환경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설파하는 것이 옳을까. 그것은 마치 정복자의 입장에서 피정복자에게 가해졌던 제국주의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닮아 있지는 않을까.




Ⅲ. 시인 이병률


 이병률 작가는 <안녕 다정한 사람>에 등장하는 모든 여행에 참여한 유일한 사람이다. 책의 기획자가 사진 촬영을 비롯해 책의 완성도를 위해 동행시킨 일종의 '셰르파' 같달까. 이병률 작가는 12월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떠날 날이 다가와도 로바니에미에 눈은 내리지 않았다. 눈을 기다리느라 내 눈가는 시퍼레졌다. 새벽에도 내다보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한번 더 바깥을 내다보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습기들을 얼려 눈꽃들만 피웠다. 마치 한 여자가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닮은 핀란드 나라 모양의 지도를 자꾸 들여다보면서 12월은 푸지게 눈 위에서 춤을 추면서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고단하도록 했다.

 하지만 내가 떠난 뒤 폭설은 가슴까지 미어지도록 덮일 거였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도, 그곳을 떠나온 나도 12월의 마지막 밤에는 거대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였다. 비록 가장 멀리 떨어진 채로 그렇게 우리가 따로일지라도."


 여행지에서 꼭 눈에 담아 가고 싶은 절경을 놓치게 되면 가슴 가장 깊은 곳까지 저린 느낌이 든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세계 3대 분수쇼를 놓쳤을 때, 미얀마에서 분홍빛으로 번지던 노을을 놓쳤을 때, 영천의 산골에서 지구를 향해 쏟아지던 별을 놓쳤을 때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런 결핍이 또다시 여행에 대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 이번엔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Ⅳ. 소설가 백영옥


 홍콩. 한 때 전 세계를 매료시켰던 아시아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곳. 그들은 도시 안에서 태어났고, 도시 위에서 사랑했고, 도시 아래에서 죽었다. 그리고 도시 뒤로 사라져 갔다.


 "각자 '신'을 모시는 할머니들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 즉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대신 때려주는 사람들이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대신 때려주다니! 늘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걸 아는 쪽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엔 이런 할머니들의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웠다.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할머니가 부적을 그린다.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그 부적을 벽돌 위에 올려놓고 때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다리 밑 제의가 시작된다. 다리 밑이라 늘 어둠이 고여 있는 이곳에선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공명한다. 이때 할머니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놀랍게도 헌 신발, 어찌나 두들겨댔는지 신발 뒤축이 너덜너덜해져 앞코로 때리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받는 가장 큰 위로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공감이라는 녀석은 공동의 적을 가질 때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너의 적이 내 적이야.라는 것만큼 든든한 것은 없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걷다가 넘어져 울기 시작하면 부모는 아무 잘 못 없는 바닥을 때리며 "이놈의 시키! 우리 00이를 넘어뜨려! 혼나야 해!" 하면서 소리친다. 그 모습을 본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이내 방긋 웃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의 어느 다리 밑 할머니들은 진정한 위로를 아는 사람들 같다. 




Ⅴ. 소설가 김훈


 미크로네시아. 이름 조차 생소한 그곳. 마치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지구의 주인인척 떠들지만 결국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는 2020년 한 해 동안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크로네시아는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곳이다.


 "... 많은 섬들을 한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우리들의 서로 다름은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바다는 우리를 격절시키지 않고 하나로 묶어준다.... 우리는 이 섬들 이외의 또 다른 고장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겪었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분열을 겪었으므로 우리는 단결을 원했다. 지배를 겪었으므로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미크로네시아 국가는 인간이 별들 사이를 항해하는 시대에 태어났다...."


 스페인, 영국, 미국, 일본까지 그들의 평화를 통해 번영을 누린 국가들이다. 아무리 과거의 잘못이라고 한들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은  그저 바다와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길 원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시대가 아닌 지금도 우리는 미크로네시아 섬들을 넘어 지구를 볼모로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윤택한 삶. 지구의 평화를 깨트린 이유로 너무 보잘것없다. 우리 역시 지구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Ⅵ.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바다는 역동성과 적적함을 함께 보여주는 신비로운 장소다. 아마도 그것은 계절, 그리고 바다의 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봄의 바다는 고요함과 평화를, 여름의 바다는 열정을, 가을 바다는 쓸쓸함을, 겨울 바다는 그리움을 표현해 내는 것만 같다.

 색은 또 어떠한가 짙은 남색의 바다는 지구 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반면, 에메랄드빛 바다는 지구의 모든 행복이 나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언제나 어디를 여행하게 되면 늘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지형에 따라, 그게 사막이든, 바다든, 산 또는 계곡이든 간에, 몸은 당연하고 마음속 감정이나 특히 머릿속의 생각들이 언제나 엄청 크게 달라진다. 바로 그런 '느낌' 때문에 아마도 어디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는 또 여기에 있다. 자연의 지형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속 감정, 머릿속 생각들이 엄청나게 크게 달라지는 경험 말이다.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 간질간질 한 '느낌'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Ⅶ. 요리사-에세이스트 박찬일 


 여행의 절반은 음식이다. 조금 더 선심을 쓰자면 8할까지도 음식에 투자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식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다. 여행에서의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첫 키스이자, 그 문화권으로 유입되어 '식구'가 되는 매개다. 가끔 누군가는 "먹으러 여행 왔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이 눈 앞에 놓인 음식보다 얼마나 영양가 없는 것인지를 속히 깨달았으면 한다.


 "그때 그 도시락은 살 만한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을 나누는 계급장이었다. 까만 헝겊 학생화와 나와 교과서를 물들일 염려도 없고, 손이 곱는 추운 교실에서도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아, 그 까만 도시락."


 도시락. 이 단어를 들으면 저마다 기억의 저편에서 장면 하나씩 날아들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소풍'과 '운동회'가 가장 많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음식과 음식의 형태는 인간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한다. 그 사람이 평생 먹은 음식을 추적하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Ⅷ. 뮤지션 장기하


 장기하가 떠난 런던. 나는 스페인 여행을 위해 잠시 경유한 기억밖에 없지만 유럽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왠지 친근감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 맛없는 음식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지만 언젠가는 꼭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다. 실망하더라도 내가 경험해보고 실망해야 하니까 말이다.


 "숙소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 시 반쯤.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은 시간에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처에 펍 한 개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번화하지 않은 주택가였지만, 결국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펍 하나를 발견했다. 내 생에 첫 영국 여행을 그렇게 에일 한 잔과 함께 시작되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장기하처럼 9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처음 만나는 낯선 땅에서 첫 끼니를 채우는 것. 설레지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장기하는 펍에서 해답을 찾았다면 나는 바르(bar)에서 정답을 찾았다. 내 생에 첫 영국 여행을 그렇게 상그리아 한 잔과 함께 시작했다.




Ⅸ. 소설가 신경숙


 신경숙은 뉴욕 맨해튼과 재회했다. 우리는 태어난 곳도 아닌 해외의 어느 도시에 대해 향수병을 느낀다. 신기한 일이다. 여행으로 갔을 뿐인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코 끝 시큰함을 느낀다. 아무래도 우리 육체가 태어난 고향과 우리의 영혼이 태어난 고향이 따로 존재한다는 듯이 말이다.


 "뉴욕이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거리에서 날마다 다른 수준급의 무료 공연들이 펼쳐져서만은 아니다. 상당한 값을 지불해야 입장할 수 있는 미술관과 공연장에 시간과 정성을 가지고 들이면 입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뉴욕에 머물고 있다면 누구나에게 그곳에서 발생하는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과 문화기부 덕택이다. 어린이들은 어려서, 학생은 학생이어서, 노인은 노인이어서, 무료입장의 기회를 주고 일반인에게도 그 기회를 마련해주는 곳이 뉴욕이다. 금요일에 '모마' 앞을 지나다 보면 오후 되면서부터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매주 금요일 다섯 시부터 문을 닫는 시간까지 평일에 20달러가 되는 입장권을 차지 않고 무료입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이 최근에는 많이 수월해졌다. 광역, 기초 문화재단들은 양질의 공연을 기획, 유치하여 주민의 생활권에서 무료로 혹은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하지만 이런 예산은 보통 국비와 지방비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세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에 대한 혜택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주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레베카>, <영웅>, <오페라의 유령>, <노트르담 드 파리>와 같은 인기 뮤지컬의 티켓은 보통 좌석이 7만 원 정도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조성진>, <손열음>의 연주를 들으려면 10만 원 족히 넘는 티켓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나마 <데이비드 호크니>, <장 미쉘 바스키아> 등의 미술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1만 5천 원 정도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되지만 이 마저도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각종 문화예술진흥기금이 모금되고는 있지만 일반인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혜택으로 돌아오는 데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 실상이다. 그나마 대기업은 자체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기업의 이윤을 문화예술로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세제의 혜택과 기업 이미지 브랜딩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라도 문화예술진흥과 향유에 대한 판이 커지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지만, 세제 혜택이나 기업의 브랜드를 위한 대가성의 기부가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Ⅹ. 뮤지션 이적


 이적의 글을 통해 퀘벡이 축제의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오듯 내게 있어 캐나다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운그레이드 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퀘벡이라는 곳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 내의 작은 프랑스라는 세계지리 시간에 배웠음직한 내용으로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펼쳐지는 재즈 페스티벌, 서커스 등은 내게 새로움을 선물해 주었다.


 "나무상자를 쌓아 테이블로 쓰는, 1940~50년대 분위기를 재연하는 술집이었는데, "이런 술집이 오히려 그 시대에는 없었다"는 거다. 지금의 눈으로, 지금의 감각으로 재현한, '만들어진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논쟁이야 특히 전통예술 분야에선 오래 있어왔지만, 이제 우리는 도시의 삶 속에서 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과거 도시의 삶의 흔적을 어떻게 현재 도시 안에 은은히 남기느냐.

 어쩌면 답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디어를 퀘벡 시에서 보았다. 퀘벡 시의 강변엔 예전에 사용하던 거대한 곡물 저장창고들이 늘어서 있다. 어찌나 흉물스러운지 만화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디스토피아적 산업도시 '인더스트리아'가 떠오를 지경이다. 시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부숴야 하나 박물관으로 써야 하나 고심하던 중, 미디어 아티스트 로베르 르파주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이 창고들을 스크린 삼아 퀘벡의 역사를 담은 콜라주 영상을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공치 아픈 흉물 덩어리가 바로 폭 600미터, 높이 30미터의 초대형 아이맥스 스크린이 됐고, 이제 밤마다 높은 예술적 완성도의 아름다운 영상물이 첨단의 음악 및 음향효과와 함께 이곳에 펼쳐진다.

 시민들은 강둑에 혹은 언덕에 늘어서 이 특별한 체험에 동참한다. 도시는 파괴 대신 리터치를 고안해냈고, 완전히 새로운 품격의 도시로 밤마다 다시 태어난다. 가상현실이 현실과 행복하게 끌어안는 장면을, 우리는 어쩌면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시에는 유휴공간이라는 게 존재한다. 물론 신도시들은 정부의 혹은 지자체의 계획대로 지어져 유휴공간의 개념이 없을 수 있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도시일수록 유휴공간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휴공간은 지역사회에서 흉물 혹은 슬럼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는 부동산 시장에서의 가치가 떨어짐을 의미하는 슬픈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 땅 혹은 건물의 활용도에 대해서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답은 예술가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 활동을 펼칠 공간에 대한 결핍을 항상 가지고 있다. 공간만 주어지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엇인가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사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예술가들이 살려 놓은 지역이 많다. 연희동이 그랬고 문래동이 그랬으며 해방촌 또한 그랬다.

 예술가들은 지역을 재창조해냈지만 그들의 노력은 부동산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잠식되었다. 개성 넘치는 공방과 갤러리로 활기를 띠던 골목에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인어의 형상과 대문자 M이 나타났고, 세상 어느 여행지를 가도 볼 수 있는 골목으로 변해버린다.

 예술가들의 피와 땀 뒤로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황무지에 쟁기질을 하던 강제 이주민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은 내 눈에만 비친 환각이었을까.


 



 2020년의 끝에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여행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1년 전 이맘때 마지막으로 떠났던 해외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베트남 호이안에서 택시기사가 숙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차를 내몰던 짜증 나는 순간도, 다낭 해변가의 한 카페 화장실 문이 고장이 나 1시간가량 갇혀 있게 되었던 어이없는 기억도, 이렇게 그리운 것이 되어 버린 현실이 구슬프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면 가장 먼저 떠나고 싶은 여행지는 방콕이다. 짝꿍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도시가 어떤 모습인지, 왜 그녀가 힘들 때마다 태국의 향기를 그리워하는지 알고 싶다. 하여 힘들 때마다 함께 태국의 향기를 그리워하며 함께 버티는 우리만의 면역력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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