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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May 04. 2021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가 사랑하는 기당미술관

서귀포 시립미술관: 기당미술관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가 사랑하는 기당미술관


 여행지에서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은 내게 있어 너무 당연하면서도 매번 설레는 일이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추리고 추렸던 곳이 '아르뗴뮤지엄', '본태박물관'이었다. 

 '아르떼뮤지엄'은 하필 여행을 가는 시기가 다음 전시를 위한 준비기간이었기에 자연스레 '본태박물관'이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본태박물관에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2020년 2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연수문화재단 최종면접을 보고 난 후, 합격하든 탈락하든 새로운 마음으로 2020년을 맞이하자는 뜻에서 떠났던 원주 여행에서 나는 '안도 타다오'를 만났다. 구룡산에 얹어져 있는 '뮤지엄 산'은 내가 본 미술관 중 가장 아름다웠고,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같았던 미술관의 동선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콘크리트, 채광, 물 등을 활용한 타다오만의 건축세계는 바르셀로나의 심장인 가우디와 닮아있었기에 저항할 틈도 없이 가슴을 울렸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한국에서 가우디를 만나기 위해, 제주에서 타다오를 만나기 위해 본태박물관으로 향했다.

 

본태박물관의 전경과 본태박물관에서 바라본 산방산

 본태박물관은 "역시 타다오!"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는 건축을 자랑했고, 무엇보다 산방산이 그대로 바라보이는 절경은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공간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된 적절한 동선과 보폭은 평온을 선물해주었다.

 본태박물관 소장 불교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 5관부터 장례, 제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4관,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방-영혼의 광채>와 <호박>이 있는 3관,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2관을 거쳐 우리나라 전통 유물(가구, 의복, 침구 등)이 전시되어 있는 1관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이 박물관에는 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도록 만들었다.

  

본태박물관 전시와 공간

 하지만 뭔가 마음이 공허했다. 분명 너무 아름다운 공간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전시가 주는 감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술관이 아닌 박물관이어서 '기획'과 '큐레이션'이 부족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안도 타다오를 만난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은 일정상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인생은 수많은 '뜻밖'들이 모여 완성되는 것일까? 본태박물관에서는 느꼈던 공허는 짝꿍이 가자고 제안한 서귀포의 한 시립미술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미술관에서 보이는 한라산


 티 없이 맑은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나는 여행지에서의 날씨 운이 그리 높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스페인 여행에서는 몇십 년 만의 봄에 내린 눈을 맞을 정도로 궂은 날씨를 동반하는 안 좋은 의미의 날씨 요정이었다. 그런 내게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보여주는 한라산에 왠지 모를 감동을 받게 되었고 오늘 만나게 될 미술관에 대한 기대는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기당미술관 전경


 서귀포에서 만난 미술관은 '기당미술관'으로 제주도가 고향인 재일교포사업가 '기당 강구범' 선생에 의해 건립되어 서귀포시에 기증되었다. 1987년 7월 1일 개관하였으니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에게 예술적 향유를 제공해온 셈이다. 

 기당미술관은 농촌에서 '단으로 묶은 곡식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더미'를 지칭하는 제주도 방언인 <눌>을 형상화한 나선형 동선의 전시실이 돋보이며, 한국의 전통 가옥의 특징인 서까래로 천장이 건축되어 있어서 자연친화적이며 전통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서까래와 나선형 동선


 내가 방문한 기간에는 <2021년 기당미술관 소장품전 : 비극의 모라토리엄>이 전시되고 있었다.


"잘 지내냐는 인사가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의미 없이 건네는 안부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지금의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웃 나라 다소 생소한 어느 도시에서 처음 정체불명의 역병이 창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무덤덤했었는데, 끝끝내 우리의 삶과 일상은 침식당했으며 그 덕분에 불안과 분노, 좌절, 정망과 같은 단어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우리들의 곁을 늘 서성이며 내근하고 있다. 무한대로 분열하는 증식에 떠밀려 지금의 이 세계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모라토리엄(Moratorium)은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유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통 국가의 경제가 몹시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 어려우니 갚아야 할 빚을 일단은 유예하겠다는 것이다. 자체로서도 매우 긴박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지불의 의무를 아예 포기해버리는 디폴트(Default)와는 달리 아직 일말의 기대와 의지를 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수구의 구멍을 일단 막아놓는다고 흘러 보내야 할 오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 눈앞에 닥쳐온 비극을 일단, 막아 세우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냉정하고 아프게 직면해볼 필요가 있다." <기당미술관 비극의 모라토리엄 中>

 

비극의 모라토리엄


 유예된 비극. 전시의 제목을 보며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제대로 직면하고 있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라는 희망이 오히려 시작된 비극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전시는 이러한 내용을 4개의 작은 주제로 다시 구분된다.


 "첫 번째 <Bionic Shock>에서는 우리를 지금 비극으로 몰고 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충격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두 번째 <슬픔의 시대, 슬픔의 도시>에서는 불안이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도시의 공허를 소개한다. 세 번째 <유예된 비극>에서는 좌절과 절망, 분노와 우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여 마지막 <태풍이 지나간 뒤>에서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아직은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끝내 잡고 싶은 희망에 대한 바람을 소개한다." <기당미술관 비극의 모라토리엄 中>


비극의 모라토리엄


 <비극의 모라토리엄> 전시는 작품 앞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넣었고, 일상이던 것들이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된 듯 그리워지게 만들어버린 현실을 다시 한번 마주한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고통을 차마 견디지 못해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애민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허탈함까지 우리의 감정은 계속해서 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는 빛이 나고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것들을 가지기 쉬운 시대적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이제 무기력할 뿐이다. 


 전시의 끝에 다가서며, "어쩌면 이런 것들에 대한 감정적 사고를 피하기 위해,  바쁜 회사일에 더 매달리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애쓰고, 더 좋은 것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모두가 <비극의 모라토리엄>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_ 허수경


<비극의 모라토리엄>이 끝나고 벽에 적혀 있던 시 한 편이 마음을 한 번 더 울렸다.


"태풍이 지나간 뒤 말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 좌절의 경험이 이 현대사에는 얼마든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여, 말이 그대를 불러 평화하기를,

 그리고 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저 종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 살아남기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中 -


 이 글을 보고 나는 바로 미얀마가 떠올랐다. 그 어떤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들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그들이 보여주었던 '밍글라바'의 미소와 끝도 없이 펼쳐지던 '이름 없는 사원'에서 받았던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는 아닐까? 생각했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이 전시의 클라이맥스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 상설전시에 있었다. 변시지는 성산일출봉 '황토빛 제주화'는 미국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을 정도로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제주'라는 '섬'을 주제로 고립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제주인을 그려냄으로써 '제주화'라는 화풍을 열었다.


변시지의 작품
변시지의 화실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낸 작품들은 캔버스와 유채라는 전통적 서양화 재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황토색 바탕에 먹색으로 그어냄으로써 오히려 수묵화가 연상되게 만든다. 물, 바람, 구름, 절벽, 풀 등의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들에서 제주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변시지의 작품


 특히 감명받았던 세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의 이름은 왼쪽부터 각각 <봄날의 한라산>, <풍파>, <폭풍>이다. 제목을 알고 난 뒤, 이 작품을 다시 보면 새롭게 혹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바람'이다.

 <봄날의 한라산>은 봄날의 살랑이는 바람이 초원을 간지럽히는 느낌이다. <풍파>는 쉽지는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말을 데리고 가려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치 '삶의 풍파'를 거스르려는 한 사람의 의지가 비쳐 보인다. <폭풍>에서는 그저 서 있기도 버거운 남자가 보인다. 바람에 더해져 파도가 하늘 높이 치솟는 모습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체감한 사람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이처럼 같은 바람, 같은 초원 혹은 언덕이라도 표현에 따라 느껴지는 분위기가 또 깨달아지는 인생의 무게가 달라진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두려우면서도 또 의지를 다지며 한참을 그림 앞에 서있었다.


기당미술관 창문을 통해 바라본 한라산


 기당미술관은 제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주를 사랑하는 미술관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제주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술관일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화장실을 가는 길에 창문 너머로 한라산의 모습이 보였다. 변시지 작가가 바라보며 캔버스에 옮겼던 한라산을 지금 나도 바라보고 있다. 내게 있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교과서적 의미를 크게 넘어선 적 없는 저 산이 이제는 달리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한라산을 품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제주를, 한라산을 충분히 느껴본 아주 먼 나중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짝꿍의 선택으로 우연히 들리게 된 '기당미술관'이지만, 오래도록 기대를 품고 있었던 '본태박물관'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가당 미술관'에서 내 삶의 모습을 만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들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제주도에 가면서 미술관을 추천해달라 말한다면, 당분간은 고민할 것도 없이 '기당미술관'에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누군가도 나와 같이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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