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머리를 쓸어 넘기면 제법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손에 잡힌다.
흰머리 나는 게 어색한 나이는 아니지만, 흰머리가 이렇게 길게 자라는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속상했다.
'얼굴에 생긴 잔주름은 손으로 잡아 올리면서 머리카락은 왜 이제 들쳐 봤을까.'
늙는다는 건 완만한 언덕 같은 게 아니라 계단처럼 툭툭 떨어지는 거라더니, 두세 계단을 건너뛰듯 노화를 만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눈을 치켜뜨고 거울에 비친 흰머리카락을 잘라보겠다고 어설픈 가위질을 해댔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분명 흰머리카락만 잘라내려고 했는데. 검은 머리카락과 흰머리카락을 동시에 잘랐다.
'쉽지 않네..'
눈에 얼마나 힘을 줬던지 눈알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머리카락은 고슴도치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았다.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만 어쩌겠나.
갑자기 늙은 것 같아서 속상한데. 흰머리라도 잘라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으니 말이다.
한참을 혼자 씨름하다가 말했다.
"엄마 흰머리 잘라 줄 사람?"
"저요"
"저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 앞다투어하겠다고 성화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당부하듯 말했다.
"꼭 흰머리만 잘라야 돼 알았지?"
재미있는 놀이라도 선물 받은 것처럼 녀석들은 신났다.
땅따먹기라도 하는 듯 똑같이 반으로 나누자며 머리카락을 반으로 갈랐다.
"이게 어떻게 반이야! 네가 더 많잖아."
"아. 알았어. 이 만큼 더 줄게 됐지?"
"아니야 똑같지 않잖아. 더 줘."
엄마는 엎드려 뒤통수를 내주고 흰머리가 없어지길 기대했는데, 흰머리는 손도 안 대고 면적으로 지분싸움을 하고 있다.
엄마가 너무 큰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거야?"
"지금 하려고요"
흰머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손으로 몇 번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오! 흰머리 발견"하고는 가위를 찾는다.
한가닥만 잘라야 하는데 서걱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분명 뭉텅이로 자른 것 같다.
".. 어..!"
역시나. 내 귀가 정확했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 내가 꾀를 냈으니까. 화내면 안 돼. 절대!'
"괜찮아. 엄마도 아까 그랬어. 한 가닥만 자르는 게 어렵더라."
계속해서 흰 머리카락 한 개에 검은 머리카락이 서너 개가 잘려나갔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온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난 오늘 안 되겠어. 유가 다 해."
그리고 온전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유는 적극적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점점 솥뚜껑을 닮아가는 두툼한 손으로 얼마나 야무지게 잘라내는지, 머리카락을 맡기고 불안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개운하고 시원한 느낌에 머리를 맡겼다. 유도 자른 머리카락을 하나씩 내밀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는 너에게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뽑으라고 머리를 대 주던 외할머니와 족집게로 쏙쏙 뽑으면서 수다 떨던 그때가 생각났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러서 흰머리를 뽑아주던 내가 뽑아달라고 머리를 갖다 대고 있는지,
내리사랑이라고 당연하게 주는 것만 하다가 거꾸로 이렇게 받다 보면 기분이 좋다 못해 행복했다.
흰머리가 나는 건 분명 기쁜 일이 아닌데, 생각지 못한 기억도 하나 둘 꺼내고 몰랐던 감정까지 헤아리는 계기가 되는 걸 보니 마냥 서운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