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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잘한기쁨 Apr 25. 2024

아들의 다정함은 짜장라면으로부터

주말 아침 떠지지 않는 눈을 쥐어짜듯 끔뻑이는데, 이내 유가 침대로 온다.

"엄마 일어났어요?"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처럼 잠에 취해서는 겨우 찌푸리듯 쓴 미소로 끄덕였다.

녀석은 그런 엄마 볼에 뽀뽀를 하고, 엄마의 등을 쓸어주고 꼭 안아주며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더 주무세요."

친정엄마 말이 '자식이 여럿이어도 아롱이다롱이더라.'라는 말을 가끔 했는데, 어릴 땐 그 말이 도통 이해가 안 가 새콤 달콤 같은 거냐고 되물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정한 유를 보면서 자연스레 '아롱이다롱이'가 떠 오른다.

정성을 쏟아 마음을 다 주고 자식을 키우는 것 같은데, 되려 받고 있단 느낌이 들어서 고맙고 행복하단 생각에 젖을 때가 있다.

행복에 겹다는 말이 더 이상 사치가 아니고, 먼 얘기가 아닌 듯 엄마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흐뭇하게 너를 바라본다.

늦잠도 행복하지만, 자식이 표현해 주는 사랑은 또 달랐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유는 마치 임무가 끝난 듯 이불을 끌어다 목까지 덮어주더니 "엄마 더 자요"하고는 방문을 닫는다.

어떤 아들이 이토록 다정할까 싶어 온갖 행복한 감정에 휩싸이려던 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일 년 내내 아니, 지금껏 단 한 번도 방문이 닫힌 적이 없는데? 방문은 있지만 닫는 용도가 되었던 적이 없는데 갑자기 방문을 닫고 나간다..?'

이상하다. 그것도 몹시.

방문을 닫기 전까지만 해도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는데, 찝찝한 생각이 스치자 누가 나에게 찬물을 끼얹은 듯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됐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유의 뒷모습을 살폈다.


살금살금 발소리가 나지 않게 주방으로 가서는 익숙하게 아래서랍을 열어 짜장라면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냄비를 꺼내 정수 물을 받고 있다.

라면봉지를 신명 나게 뜯는 녀석의 행동이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아. 이래서 엄마를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이불 덮어주고 자라고 한 거였구나.. 요놈 요고...'

분명 아침부터 라면은 안된다고 했는데,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그냥 먼저 끓여줄걸 싶다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데 지키지 않는 녀석한테 한소리 할까 싶다가..'이 생각 저 생각에 머뭇대며 녀석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유는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 것 좀 도와주세요. 아빠~"

아빠가 유에게 다가가 주방을 살폈다 "너 짜파게티 먹을 거야?"

헤벌쭉 웃더니 조용하고도 씩씩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엄마는 몰라요"라고 용감하게 말했다.

이미 문틈으로 다 보고 있는데, 엄마를 완벽하게 속였다는 생각과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단 생각에 녀석은 이미 어떤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와중에 다정하고 친절한 아빠는 인덕션 켜는 방법을 알려주고, 물이 끓으면 면이랑 건더기 스프를 넣으라고 일러주기까지 했다.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유는 물이 끓자, 조심조심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고 타이머를 누르고는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와. 벌써 라면도 끓이고 멋진 형아로 크고 있다"며 폭풍 칭찬을 아낌없이 쏟으며 뜨거운 물도 싱크대에 부어주었다. 그리고 화상 위험이 있으니까 혼자 있을 땐 하지 말라는 당부를 더 하며, 유의 일탈인지, 성장인지 모를 일을 도왔다.

유는 면발만 남은 냄비에 나머지 스프를 털어 넣었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할머니 파마머리 같은 면발을 들어 올려보며 제비처럼 입을 벌려 온 집안에 후루룩 소리가 울릴 만큼 요란하게 먹었다.

오른손은 짜파게티를 건져 올리는 면발이 들려있고, 왼 손으로는 역사 만화책을 넘기고 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하던 내 모습을 또 너를 통해 만났다. 익숙하지만 낯설다.)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을 했으면 이렇게 자연스럽고 정확한 순서로 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자연스럽게 자립하는 것을 기대했으면서 여전히 아기로 대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엄마를 기만했다기보다, 이렇게 형님으로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르고 통제했던 엄마의 아둔함이 되려 부끄러웠다.

.

.

그 어렵다는 주말 아침에 엄마를 눈 뜨게 하는 걸 보니, 너는 분명. 심봉사 눈뜨게 한 효녀 심청이보다 더 극진한 효자가 아닌가 하고 엄마는 깊게.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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