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ada 9
밀롱가에서 춤을 춘 기억에는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떨리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그 열린 공간과 낯선 눈빛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엔 준비가 부족했고, 솔직히 두려웠다. 그럼에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렜기 때문이었다.
그 론다에 몸을 실어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순간, 음악 속에서 연결감을 느꼈던 그 짧고도 강렬한 경험이 떠올랐다. 아직 많이 서툴지만, 탱고의 세계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는 갈망이 가슴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침묵을 삼키다,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하필 왜 저죠?"
정말 그것이 궁금했다. 춤도 못 추고, 아직 한참 부족한 나를 왜 굳이 선택했을까. 사실 이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춤을 잘 추지도 못하고, 이제 막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내가 무슨 메리트가 있을까.
에밀리아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 말없이 웃었다. 그러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부담스럽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억지로 데려가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함께 배우는 입장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런 거, 선배들이 해줘야 하잖아요?"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말 끝엔 싸늘한 기류가 감돌았다. 하지만 말은 다정했고, 제안은 달콤했다. 의심할 이유도, 의도를 따질 근거도 없었다. 그냥 친절이었을 뿐. 도움을 건넨 것뿐.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바로 답 안 하셔도 돼요. 수업 없는 날, 그냥 가볍게 한 번쯤 도전해보자는 거니까요."
망설이는 나를 배려하듯 에밀리아가 한 발 물러섰다. 나조차도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멍하니 서 있는데, 그녀가 가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연락처 알려주시겠어요?"
그 말에 홀린 사람처럼 휴대폰을 건넸다. 그녀는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찍혔다. 방긋 웃으며 "연락 기다릴게요" 하고 말한 그녀는, 다음 순간 다른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툭 두드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엘리아나가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이렇게 놀라요?"
그녀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별 얘긴 아니었어요. 선배로서 피드백을 좀 해주신다고 해서요. 그게 다예요."
순간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요? 뭔가 더 있는 것 같던데?"
엘리아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녀는 잠시 날 지켜보다 이내 화제를 바꿨다.
"흠 뭐, 선배들의 피드백은 도움 되죠. 저도 아까 루크 님이 몇 가지 알려주셨어요. 서로 들은 거 공유해볼래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생각보다 그녀가 탱고를 대하는 태도는 더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생각보다 엘리아나는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괜히 의심했던 게 살짝 미안해졌다. 다만, 루크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내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가 루크와 이야기할 때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녀가 나를 두고 루크와 파트너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어쩌면 순진하게 내가 그녀의 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의문이 들었다. 나처럼 다른 제안들을 들었지만, 숨기는 걸지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은 축을 세우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서로가 바로 서야 함께 춤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들은 피드백을 정리하며 말했지만, 내 머리는 자꾸 다른 데에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대화가 흐릿하게 들렸다. 계속해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파트너십을 하기로 했으나, 과연 정말 이 파트너십이 유지가 될 것인지, 연습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듯 집어삼켰다.
"데이빗 님? 듣고 있죠?"
그녀의 부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아, 네. 말씀하신 거 저도 공감해요. 축이 중요하죠."
"집중하세요. 우리는 갈 길이 멀잖아요. 벌써부터 포기하고 싶어지면 곤란해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녀는 다시 힘차게 말했다.
"파이팅이에요. 우리, 잘해봐요."
그녀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진 탓에 내가 탱고를 포기하려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걱정하며 내게 말했다. 포기하지 말자고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 나를 격려했다. 그녀의 격려를 들으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전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어서 들었던 피드백을 공유해 주었다. 그녀의 피드백을 듣고, 나 또한 들었던 피드백을 공유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말했다.
"결국 탱고도 인간관계랑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요?"
"자신이 바로 서지 않으면 관계도 바로 설 수 없잖아요. 춤도 똑같은 것 같아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자기 중심은 놓지 않아야 하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마치 연인 사이 같아요."
당황한 나는 되물었다.
"네? 뭐가요? 파트너십이요?"
"아니요, 탱고란 춤 자체요. 좋은 관계를 위한 조건들이 꼭 닮았잖아요."
그녀는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것인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선은 나를 향하는 듯했으나,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런 그녀를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이 너무 길어지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요. 탱고는 둘이 하나가 되는 춤이니까. 상대의 심장을 느끼는 춤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결국 저보고 축을 세우라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데이빗 님, 상체가 자꾸 숙여지거든요. 그거부터 고쳐봐요."
"그건 엘리아나 님도 해당되는 거 아시죠?"
"그럼요. 저도 잘하는 건 아니니까. 같이 노력해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자의 약점을 확인하고 연습을 이어갔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지만, 우리는 온전히 연습에 몰두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애써 동작에 집중했다.
연습이 끝난 뒤, 엘리아나는 일이 있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지자, 눌러두었던 생각과 의심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녀의 말들을 곱씹으며 짐을 정리하던 나는, 떠오르는 얼굴 하나를 애써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