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ada 10
며칠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말사무실에 앉아 있음에도 이미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탱고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해 본 적이 있던가.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무엇을 원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무언가를 바라거나 바랐던 적이 없었다. 평생을 욕심은 나쁜 것이라 배워왔다. 욕심을 가지는 건 좋은 게 아니며, 욕심을 내면 인생이 힘들어진다고, 삶을 망친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조이와, 엘리아나와 나눴던 말들이 계속해서 나를 좇아 다녔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해도,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머릿속이 들끓는 것은. 눈을 감고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눈을 감으니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고 화면을 바라봤다. 띄워놓은 자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명의 성직자들이 보내온 답변들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받은 자료를 정리하며 대본 작업에 몰두했다.
첫 번째 질문인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수호와 정율의 답변을 정리했다. 그들이 쉽게 읽고 논의할 수 있도록 배열을 조정하고, 흐름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답변들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된 문장들이었고, 성직자다운 진지함과 깊이가 있었다. 그들의 답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직자로서 그들이 인생을 헛되이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구체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연에 대한 명확한 조언보다는 성찰을 유도하는, 여운이 남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내용을 바라보며,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에게 어떤 조언을 건넸을까.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을 굳이 나누는 순간부터,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조건을 따지게 되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감정만 남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을 것이다. "정말 그를 사랑하시나요?" 그리고 덧붙였겠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 얼마나 무책임한 대답인가. 생각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깨달았다. 그 사랑의 결말이 어떠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말은 가볍고, 위로는 공허하다. 현실 앞에 선 이들에게 얼마나 허무한 말이었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
그런 말을 했던 나는, 현실을 마주하기 전의 나였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말의 가벼움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기회만 된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사랑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가만히 질문을 바라봤다. 자윤에게 그 선택은 현실적인 타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을까. 한 사람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사랑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깜빡이는 커서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정작 내가 답변하지도 못 질문들을 놓고서 혼자 망상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떴다. 노력과 달리 때때로 의미 없는 상상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만약에, 만약에, 라며 다른 미래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의식은 현실을 벗어나 꿈속을 유영했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면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적응할 만도 한데, 어리석게도 적응하지 못했고, 인정하지 못했다. 원망하지 않으려 했지만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었으니까. 조각나버린 이 마음을 어떻게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을까. 심지어 몇몇 조각들은 사라져 찾을 수도 없는데. 이제는 '나'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었다. '나'는 조금씩 의미를 잃어갔다.
"그래도, 지금은 탱고를 하잖아"
갑자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러고는 작게나마 안심했다. 이게 뭐라고.
첫 번째 질문은 어느새 정리가 끝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도 몰랐다. 곧장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연훈의 답변을 정리했다. 그의 문장들 사이로 마치 "당신이 틀린 게 아니에요"라고 속삭이듯 건네는 말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따뜻함에 다시 흔들릴 것 같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마지막 답변이 담긴 메일을 열었다.
보내는 사람 옆에 적힌 '자윤'이라는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클릭을 하려다 멈칫했다.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결국 손을 놓고 의자에 기대었다. 차마 그녀의 대답을 열어볼 수 없었다. 노트북을 닫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사무실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듯했다. 낯선 정적이 가슴을 조여왔다. 주변을 둘러보다, 사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불빛이 마치 구조신호처럼 느껴졌다. 지훈이라면,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 혼란을 잠시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알 수 없는 적막감에 손에 땀이 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