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ada 11
사장실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지훈은 거의 나갈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가방을 들고 자리를 떠나려던 그를 보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훈은 나를 보더니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곤 무슨 할 말 있냐는 듯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무슨 이야기? 급한 이야기야? 나 가봐야 되는데."
"잠깐이면 돼요.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형이 아니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흠, 꼭 지금이어야 돼?"
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하... 그래, 뭔 이야기인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뭐가 궁금한데?"
"일단 앉으시죠. 차분히 이야기하고 싶어요."
지훈은 잠시 나를 뻔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나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빨리 이야기를 하라고 눈짓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이 볼 때, 저는 어떤 사람이에요?"
"네가 어떤 사람이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구체적으로 말해봐, 돌리지 말고."
"그냥, 형이 생각하는 나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상처 안 받을 자신은 있고?"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 그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물러설 수 없었다.
"네, 상처받지 않아요. 이야기해 주세요."
"너? 최악이지. 할 줄 아는 건 없으면서 더럽게 잘난 척하고,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만 다 안다는 듯 말하는 게 기본 값으로 몸에 배어있고, 거기에 은근히 남들 깔보며 무시하는데 자기는 그걸 남들이 모르는 줄 알잖아. 남의 말은 귓등으로 듣는 건 다반사면서 자기가 옳다는 고집이 있어서 남의 조언은 들을 생각도 없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은 일단 배제. 그리고 또 뭐가 있으려나?"
그의 평가는 냉혹했다. 마치 출간 전 원고를 평가하듯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일부러 상처 주려고 고른 말 같았다. 참았던 감정이 끓어올랐다.
"형,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시면 형도 만만치 않잖아요. 왜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처럼 말해요."
"그렇지, 이거지, 인정하지 않음도 추가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 저 진지해요. 장난 아니에요."
"나도 진지해. 너 지금 분해서 죽을 것 같잖아. 네가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공사도 구별 못하는 이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해."
"그, 그건,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서가 아니라? 뭐? 네가 늘 말하는 대로 버림받아서 그렇다고? 자윤이가 널 버렸다고? 피해의식에 살지 말. 정신 차려."
그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나는 점점 주눅이 들었지만, 억울함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의 말을 쉽게 동의하며 수긍할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잖아요. 과거엔 결혼한 사례도 있었잖아요. 근데 지금은 안 된다고 하면서 왜 저는 쫓겨나야 했죠? 형도 그렇게 나왔잖아요. 억울하지도 않아요?"
"나랑 너를 엮지 마. 비슷한 경험이 있어도 그게 공통분모가 돼야 할 이유는 없어. 적어도 나는 불만은 없거든."
"어떻게 불만이 없어요? 제 인생 무너졌는데요. 제 꿈은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거였어요. 그게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그 사람 때문에. 그런데 그걸 그냥 받아들이라고요? 형은 그게 돼요?"
그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게 자윤이 때문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아직 멀었어. 걔가 널 포함해서 많은 사람 인생 구제한 거야. 차라리 고마워해야 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저보다 열심히 한 사람 있었어요? 그런데 왜 지금 이러고 있죠? 조연으로 남아야 해요?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경력도 없는 널 취직시켜줬더니 배은망덕하네. 그게 네가 말하는 마음공부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억울해서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가 점점 격해지자 그의 표정도 식었다.
"누구 때문인데?"
"이게 다 자윤이 때문이잖아요! 걔만 아니었으면 저는 이런 일도 없었어요. 그 길을 그만두고 나와 결혼했더라면, 그것도 아니면 잠시 나를 기다려줬다면, 저는 아직도 그 길을 걷고 있었을 거예요. 지금쯤 저는 저 무대 위에 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저를 봐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잖아요. 그 사람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이 꼴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고요."
"아진아, 잘 들어. 네가 겪는 일 중 네 책임이 아닌 건 없어. 인과응보야. 다 네가 만든 일이야. 그걸 수용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형, 저보다 먼저 나가셨으면 잘 척하지 마세요. 저도 인과가 뭔지 모르지 않아요. 그게 다 제 잘못인 듯 말하는 것 자체가 형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설령 그게 제 탓이라고 해도,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는 거예요? 어디 한 번 말해봐요."
"하하, 말 한 번 잘했다.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정말 그럴까? 그래, 네가 그렇게도 주장하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해 물어보자. 네 입으로 말하잖아, 너는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버림받았다고. 정말 네가 사랑했을까?"
"전 정말 자윤이 사랑했어요. 제 인생을 걸 만큼, 함께 미래를 그릴만큼, 그게 아니면 제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걸 다 져버리고 저를 바보로 만든 건 걔예요. 그런 제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아진아."
"하, 참, 형, 웃기는 소리 그만하세요.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인데요."
그때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와 나 사이의 일도 잘 모르는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랑은 말이지,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했나 걱정하는 거야. 네가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위해 희생했니? 넌 그냥 그녀를 갖고 싶었던 거야.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한 사랑이었어."
"아니요, 저도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위안을 얻었고,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행복했어요. 그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그녀를 위해서 묵묵히 그 힘든 과정을 견뎠어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랑의 비참함을 알기나 하세요? 내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만 있는 사람의 심정을 아시냐고요!"
"여태 공감을 바라면서 이야기하더니, 이럴 때는 또 자기만 느꼈던 특별한 경험인 것처럼 이야기하네? 모를 것 같아? 그 감정을? 오히려 너보다 더 잘 알면 알았지 모를 리가 없잖아? 이러니 내가 네게 이야기하는 거야, 피해의식 덩어리라고."
그가 혀를 차며 이야기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음에도 지훈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억울하게 그의 말만을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잘 아시겠네요. 제가 얼마나 비참했을지. 그런 걸 다 견디면서 버텼다고요. 저는 오직 마지막 선택, 그 하나만을 그녀에게 맡겼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됐죠? 그런데도 제 잘못이라고 이야기한다고요? 제가 사랑하지 않았다고요?"
"아진아, 네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말이지. 너는 절대 그녀에게 그 성직의 길을 그만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야 했어. 인정하자, 넌 그저 그녀를 가지고 싶었던 거야.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뿐인 애새끼였던 거지.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가지고 장난질하는 순간 넌 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인한 거야. 이 멍청한 녀석아."
그의 말은 날카로웠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찔렀다.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그의 말 앞에서는 도리어 탐욕으로 보였다. 그 순간, 차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는 순간 가슴속에 있던 자신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사랑하면 함께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 관계를 떳떳이 드러내고 싶은 욕망, 그게 뭐가 잘못이에요? 다들 하는 거잖아요. 그 기다림 자체가, 그 참음이 바로 사랑 아니냐고요!"
"나는 포기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말이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미래, 그 사람의 인생, 그 사람의 행복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했어야지.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찾아야 했어. 네 인생 전부를 그 사람을 위해서 쓸 수 있었어?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런 말들이 네 입에서 나오진 않았겠지."
그는 말 끝에 가방을 들었다. 더는 나눌 말이 없다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의 단호함 속엔 묘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두드렸다.
"생각해 봐."
그 말만 남기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떠나려는 그의 등을 향해 마지막으로 물었다.
"형, 그렇게 별로라면 저는 왜 데리고 있으세요?"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춘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말했다.
"닮았잖아."
그저 잠시 멈춰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가 답했다. 그는 그 후 문을 열고 사장실을 나섰다. 나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