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ada 12
돌아가는 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더는 인정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신랄한 평가 앞에서는 가슴이 후벼 파이듯 아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이 모양이라 해도, 적어도 남들 눈엔 번듯해 보이 살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자윤을 정말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특별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이루어가는 '나 자신'을 사랑했던 걸까. 내 감정도, 내 선택도 거짓 투성이 같았다. 지하철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바람 앞에 점점 꺼져가는 내 마음처럼.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래도 너 생각해서 해준 말이야.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했는지도 알아. 하지만 네게 더 도움이 되는 말은 칭찬보단 쓴 말이야. 다시 한번 네 인생을 복기해 봐. 큰걸 얻을지 모르잖아. 아, 그리고 네가 궁금해하던 네 스승님 연락처 구했다. 정말 뵙고 싶으면 말해. 보내줄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용기 나면 알려줘.]
모진 말 끝에도 걱정이 남았던 걸까. 지훈의 문자는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그가 나를 완전히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미움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이 모든 걸 잊고 싶었지만,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약속 기억하죠?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밀리아였다. 밀롱가에 함께 가자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그녀는 헤어진 날 밤에도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틀째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 그녀뿐이었다. 천천히 답장을 써 내려갔다.
[혹시 오늘 보실래요?]
문자를 쓰고도 한참을 보내지 못했다. 이 선택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밀러나 조이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리를 스쳤다. 전송 버튼 앞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지하 터널의 불빛이 빠르게 흘러가며 시야를 흔들었다. 오늘따라 그 빛의 번짐이 유독 눈부셨다. 머리가 아플 만큼 강렬했다. 그래서였을까. 다리도 아팠다. 서서 가는 지하철 안, 마침 앞자리 승객이 일어났다. 운명처럼 생긴 빈자리에 망설임 없이 앉았다.
"뺏길 수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동시에 문자를 보냈다.
버튼을 누르고 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기가 창피해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한 행동이 충동은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던 찰나, 진동이 울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핸드폰을 꺼내 놓고도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또다시 진동이 울리고 화면엔 익숙한 이름이 떴다. '에밀리아'. 잠금을 해제해 메시지를 열었다.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때마침 제가 자주 가는 밀롱가에 왔는데, 함께 하면 되겠네요. 저는 이미 밀롱가 안이니까, 도착하면 연락 줘요.]
메시지를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이 떨림이 죄책감인지, 설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 더러운 기분을 잊고 싶었다. 춤을 추면 괜찮아질까. 잊을 수 있을까. 눈을 감았다. 지하철의 진동이 의자로 전해졌다. 내 떨림을 감춰주는 그 진동이 오늘따라 위로 같았다. 마음을 추슬러보려는데, 홍대 도착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눈을 뜨고, 가방을 챙겨 내렸다. 지금은 오직 밀롱가에 집중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많았다. 홍대 거리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늘따라 손을 꼭 잡고 걷는 연인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누군가에겐 흔한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적일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으니 기적이라 부르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고 에밀리아가 보내준 주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붐비는 거리 너머, 어두운 빌딩 하나가 보였다. 지하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 틈 사이로 아른거리는 조명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기구나. 빛을 향해 걸었다. 부나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