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루나 2 - 사카다 13

Sacada 13

by 양희범

계단을 내려가자 바닥부터 깔리는 탱고 음악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문을 열고 밀롱가로 들어서니 음악의 울림은 한층 더 커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론다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공간은 열기와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사이로 스치는 시선 속에 에밀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조명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모습은 마치 이 공간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선율처럼 퍼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밀려왔다. 상대와 부드럽게 회전하는 그녀의 춤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애써 시선을 거두며 입장료를 지불하고, 탈의실로 가 채비를 갖췄다.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한 딴따가 끝났고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나는 웃음을 감추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포옹으로 나를 맞이하며 자리를 권했다.


"위치가 나쁘지 않아서 그래도 찾아올만했죠?"

그녀가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 다행히 길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친근함에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기분 좋은 향기였다.


"왔으니 춤춰야죠? 준비 됐나요?"

그녀가 의도적으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말투는 선생님 같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경직된 채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이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함께 하 와이셔츠가 내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하얀색 원피스와 상반된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게 신경 쓰였다. 그녀에게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 내면에 무언가를 자극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다시 한번 그녀의 원피스 자태를 확인하면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선을 더 아래로 두어서는 안 됐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다 배우는 과정이니까. 제가 함께 하잖아요. 춤출 거죠?"

그녀는 따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꼬르띠나가 끝났고, 그녀는 다시 눈을 맞추며 까베세오를 했다. 우리의 눈빛과 미소가 교차했다. 처음 느껴보는 진정한 까베세오였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부끄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론다에 나섰다. 오늘따라 음악은 유난히 끈적했다.


춤을 추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향기가 움직일 때마다 내 코끝을 자극했기에 춤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춤도 평소와 달랐다. 부드럽고 유려했고, 무난했던 동작들이 강한 여운으로 남았다. 이게 탱고일까, 문득 생각이 스쳤다. 엘리아나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건 파트너십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유야무야 시간이 지나고 음악이 멈췄다. 춤이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온몸에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열대 과일 같기도 하고 꽃향 같기도 한 달콤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향기에 취해있는데 문득, 엘리아나에게 밀롱가를 간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고민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내용이라 생각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였다. 미세한 떨림들이 복잡한 감정을 밀어냈고,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에밀리아는 땀을 훔치며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는 손수건을 보고 미소 지으며 받았고, 땀을 닦는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떨림이 피어났다.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했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얼굴에 감촉이 느껴졌다. 놀라 눈을 뜨자, 에밀리아가 내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어두워서 그런지 몰라도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미소만이 가슴을 뛰게 할 뿐이었다.


어때요? 재밌죠?"

그녀가 물었다.


"탱고에 빠져버릴 것 같아요."

나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미 반쯤 빠지신 것 같은데요?"

그녀가 웃었다.


"그런지도 모르죠. 밀롱가에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덕분에 고맙습니다."

무언가 떠오를 듯 아찔했지만,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좋아할 줄 알았어요. 한 번만으로는 부족해요. 저번에 표정이 안 좋았어서 걱정했어요. 이젠 좋은 추억도 생겼으니, 자주 다녀야겠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두어 번 다른 사람과 까베세오를 했지만, 대부분 그녀와 춤을 췄다. 탱고를 처음 시작했을 때 즐겁다는 느낌보다는 이 춤을 통해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탱고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잊힐 정도로 에밀리아와 함께한 시간은 강렬했고, 춤은 즐거웠다. 이 시간이 계속되길 바랄 만큼.


그녀와 탱고에 대해 이야기하며, 탱고를 추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길게만 느껴졌었던 밤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마지막 딴따라는 외침이 나왔다. 오늘의 마지막 탱고가 론다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노래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밀리아였다.


"어, 이 노래. 'El Motivo(이유)'예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너무 좋다. 마지막은 함께 하실까요?"

그녀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론다로 나갔다.


춤을 추며 토크콘서트를 떠올렸다.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았다. 우연히도 콘서트 장소는 이 밀롱가 근처였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대본과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데이빗 님, 박자를 세면서 들어야 춤이 더 재밌어요."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말 한마디가 복잡한 생각을 잠시 마취시켰다. 무슨 상관일까. 이렇게 춤만 출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고민은 점점 형태를 잃었고, 머릿속에는 온통 탱고만이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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