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루나 2 - 사카다 14

Sacada 14

by 양희범

연습보다 밀롱가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즐거웠다.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릴 겨를조차 없었다. 이주의 시간은 그렇게 사라졌다. 주에 두 번씩 하던 엘레이나와의 연습은 어느새 한 번으로 줄었고, 나머지 저녁 시간은 대부분 에밀리아와 함께 밀롱가에서 보냈다.


서울에 이렇게 다양한 밀롱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매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밀롱가가 열렸고,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몰라도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탱고를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지훈의 끊임없는 보챔이 아니었다면, 일마저 잊고 춤에만 몰두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에는 오직 탱고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춤을 더 즐길 수 있을지, 밀롱가에서 에밀리아와 어떤 무브먼트를 시도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해야 할 일들은 자연스레 뒤로 밀렸다. 다음 주가 토크 콘서트임에도 불구하고 대본은 여전히 미완이었다. 마감 기한이 오늘 자정까지였기에, 어쩔 수 없이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대본은 자윤의 답변에서 멈춰 있었다. 다른 부분들은 기계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자윤의 답변만큼은 손댈 수 없었다. 내용을 정리하려면 그 답변을 읽어야 했고, 그 이야기가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싶었다. 에밀리아와의 시간을 핑계 삼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저장된 폴더를 열며 심호흡했다.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일을 열고, 자윤의 답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진실한 사랑’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진실하다'라는 말이 '사랑'이란 말에 수식어로 붙어 만들어집니다. '진실하다'는 마음에 거짓이 없고 순수하며 바르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남녀 간에 서로 좋아하거나 그리워하는 마음 등을 포함합니다.


결국, 진실한 사랑이란 마음에 거짓이 없고 순수하며 바른 사랑이라는 뜻이며,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 이러한 진실한 사랑만큼 중요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진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진실한 사랑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이죠.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서 우리가 가장 핵심적으로 던져야 할 물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의 문장을 읽으며, 알 수 없는 박탈감이 밀려왔다. 수학하던 시절, 대부분의 원고는 내가 다듬어줬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스스로 탄탄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것도, 내가 발붙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서. 그녀의 성장이 뿌듯하기보다는, 나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듯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제자리였다.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 파일을 닫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다시 스크롤을 내렸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수호 신부님의 말씀처럼 에로스, 플라토닉, 아가페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육체적, 정신적,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율 목사님의 말처럼 ‘가장 고차원의 사랑은 은혜이다’라는 관점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개념적인 것들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계신가요? 연인, 배우자, 아이, 무엇이든 좋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대상은 사실 대부분 타자입니다. 내가 아닌, 나를 기준으로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상대를 사랑하죠.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해, 그러니 날 사랑해 줘." 사랑한다는 말속에 사랑받고 싶다는 바람을 숨긴 채, 우리는 사랑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대는 대부분 충족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특별한 이상향의 상대를 설정하고, 그에게서 사랑받기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시스템적으로 충족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온전히 그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드뭅니다. 보편적으로는 사랑을 갈구하다 모든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펴봐야 합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과연 제대로 설정돼 있는가를요. 각자의 세상은 모두 각자의 사상과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같은 장면을 봐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가 다른 개념과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각자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중심에는 내가 있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대상 또한 결국 나로부터 비롯된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 대상은 온전히 '그 사람'으로 내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으로서 내 세계에 편입된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트라우마, 결핍, 경험, 생각 등을 토대로 허구적인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놓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언제나 "사랑해 줘"라는 말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제대로 된 대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원하는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나는 사랑을 원합니다. 그렇기에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기대하고 전하려 할까요?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 충족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결핍에서 비롯된 사랑은 어딘가 비틀리기 마련이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에서도 자성불(自性佛)을 믿는 것이 마음공부의 중요한 요건으로 여겨집니다. 자성불이란 내 안에 부처님의 성품, 곧 마음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자신의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진실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여기까지 그녀의 답변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보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성장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문장 속에서 그 단편이 보이는 듯했다. 그럼에도 인정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 부분들이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녀는 사랑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을 사랑할 거라면 왜 사람들은 타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걸까. 그것조차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굳이 정독하지 않고, 레이아웃에 맞춰 정리를 하려는데 흥미로운 문장이 눈에 띄었다


[저도 사실 제가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결혼이 허용되지 않은 이곳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란 사실상 사치이자 금기였습니다. 사람은 금기에 끌린다는 말이 있죠? 그 말처럼 저 또한 그런 금기에 끌렸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차례 열병처럼 감기가 지나가듯, 사랑도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요. 지금에서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건 제게 치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울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과 만나고,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진실한 사랑을 원하신다면, 먼저 자신과의 만남을 이뤄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여태껏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경험을 숨기려 했었다. 그녀가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경험 자체가 그녀에게 상처인 듯 행동해 왔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날의 일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크게 패배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끝난 사이였지만, 또다시 그녀에게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의 일들은 단순한 에피소드로, 그녀의 성장을 일으킨 하나의 경험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차라리 아픈 사랑으로 남았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고, 혹은 원망으로 남았다면 열렬히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그녀에게 진실한 사랑이란 결국 자신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이제는 그녀에 대한 분노를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녀의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너는 그녀에게 바라기만 했지, 진정으로 사랑을 준 적은 없어.", "게다가, 너는 스스로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멍청이야." 그 말들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허탈했고, 서글펐다. 내 인생은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부정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악취처럼 퍼져나갔다. 마치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쳐야 내 삶이 만족할 수 있을까. 답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방법들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원망뿐이었다. 누군가 이 냄새나는 나를 향기로 감싸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 얼굴은 에밀리아였다.


빨리 이 거지 같은 일을 마무리하고 에밀리아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런 복잡한 감정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잡념을 떨쳐내며 작업에 착수했다. 빠르게 일을 끝내고 에밀리아에게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써낸 답변의 내용을 최대한 무시한 채 대본 작업을 완료했다. 정리된 파일을 사람들에게 보내고, 프린트를 마쳤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에밀리아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타이핑을 하는데, 갑자기 SNS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엘레이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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