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루나 2 - 사카다 15

Sacada 15

by 양희범

[어제 수업은 왜 빠지셨어요? 빠지면 빠진다고 이야기를 해주셔야지, 말도 안 하고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정기적으로 같이 연습하는 날인 걸 잊으신 건 아니죠? 너무 화가 나네요. 같이 대회 나가기로 한 건 기억하시죠? 정말 화가 나서 다 때려치우려다가 연락드려요. 연락을 피하는 걸 묵인하는 것도 이제 조금 지치네요. 만나서 이야기 좀 해요. 답장 기다릴게요.]


문자를 확인한 후,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누군가 머리통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피하고 싶은 일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 점점 조여올 뿐,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답장을 해야 했지만, 막상 답장을 하고 나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는지, 무엇을 감춰야 할지, 죄책감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점점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 안의 영역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엘레이나의 메시지를 닫고 SNS를 종료했다.


누구를 만나야 할까. 엘레이나인가, 에밀리아인가. 어디로 가든 결국 발길은 홍대입구역을 향해야 했다. 나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도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하고, 무기력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


[벌써 밀롱가에 가셨나요? 저도 지금 출발합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알려주시면 거기로 갈게요.]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손끝이 떨렸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그 따위 감정은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 양심을 '따위'라고 여기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와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지만, 무음으로 전환한 채 모른 척했다.


역에 도착하자, 복잡한 생각을 지하로 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맡기고, 오직 탱고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모든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음악과 상, 그리고 스텝만이 남았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늘 에밀리아가 있었다. 부드러운 리드로 함께 춤을 완성해 가는 그녀와의 시간은 나에게 유일한 평온이었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밀롱가 입구에 다다르자, 닫힌 문 너머로 탱고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선율에 홀린 듯, 지하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늘따라 에밀리아는 춤을 추지 않고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인사했고, 그녀는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그 미소는 조명 아래에서 더욱 눈부셨다.


"좀 늦었네요? 연락 없어서 안 올 줄 알았어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언제 끝날지 몰라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미안해요."


"죄송해지라고 한 말은 아닌걸요. 못 오면 아쉬울 뻔했다는 이야기죠. 왔으니까 됐어요. 준비되셨나요? 몸 풀어야죠."

그녀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꼬르띠나가 끝나고, 탱고가 시작됐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론다로 이끌었다. 막 시작된 노래라 그런지, 론다 위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내게 다가와 아브라소를 만들었다.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맞닿는 듯한 느낌에 충족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자극된 감각을 억누르며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스텝을 옮기며, 탱고를 처음 배웠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박자를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음악에 맞춰 춤추고 싶었지만, 박자가 들리지 않아 매번 헤맸다. 그때 내게 손으로 박자를 세어주며 인도해 준 사람이 에밀리아였다. 그녀 덕분에 박자를 익히고, 음악과 하나 되는 춤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금도 그녀는 내가 미세하게 박자를 놓칠 때마다 자연스럽게 리드로 나를 이끌어줬다. 그런 그녀의 배려가 고마워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를 느꼈는지, 그녀의 오른팔이 조금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바리에이션 구간에서 사카다 한 번 해볼래요?"


나는 긴장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주가 시작되는 구간부터 사카다를 시작하며, 오른쪽으로 히로(Giro) 동작을 이어갔다. 그녀의 다리 사이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며 스텝을 밟았다. 그녀가 자리를 내어줄 것임을 믿고, 그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항성처럼 내 주위를 회전했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 달처럼, 내 궤도를 따라 돌고 있었다. 문득, 회전하는 틈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즐거움이 가득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나도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얼굴 너머로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론다 밖에서 누군가 우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한 눈빛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엘레이나가, 싸늘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루크도 함께 서 있었다. 굳은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 루크가 엘레이나를 여기에 데려왔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의 표정을 보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해도, 여기에까지 찾아오다니.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내 얼굴에서 순식간에 긴장이 흘러나오자, 에밀리아도 주변을 살폈고, 이내 루크를 보고 그녀의 표정 또한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무래도 불청객들이 온 거 같네요."

에밀리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내게 속삭였다. 마침 노래가 마무리 됐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스텝을 마무리했다.


춤이 끝난 뒤 나 론다 위에 선 채로 고민에 빠졌다. 이제 막 딴따가 시작됐으니, 나머지 곡들을 마저 추고 그들과 마주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대면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마음은 춤을 더 원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더는 안 될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론다를 나갈까요? 하고 물었다. 에밀리아는 괜찮다고 말하며 다음 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주저하자, 그녀는 나를 리드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은 두 곡을 더 췄다.


마지 곡이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주시하는 엘레이나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 그 표정보다 더 단단하고, 더 차가웠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에밀리아가 갑자기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루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점점 엘레이나에게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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