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루나 2 - 히로 1

Giro 1

by 양희범

히로(Giro) -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지 않는다면, 결국 제자리일 것이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 달이 지구의 주위를 맴돌듯이.


엘리아나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그런 무표정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오른팔에 팔짱을 끼고 따라오는 에밀리아의 행동이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거리를 두었더라면 이 상황이 덜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슬쩍 팔을 빼보려 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강하게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녀가 보였던 친절이 모두 의도된 것이었을까. 점점 더 험악해지는 루크의 표정을 보며 그 생각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나고, 우리는 결국 엘리아나와 루크 앞에 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작정 사과하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변명을 하자니 스스로가 비겁해 보였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는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엘리아나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로 차 있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우 시선을 맞추고는 이내 피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 앞에서, 우리는 관객이 둘러싼 무대 위의 배우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듯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는 와중에 또 다른 딴따가 시작됐다. 춤을 추러 나가면서도, 춤을 추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이쪽을 향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밀롱가 안은 시끄러웠지만, 우리를 감싼 공기만큼은 적막했다.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내 말에 엘리아나는 짧게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에밀리아 양과 루크 군이 연인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어요?"

대뜸 그녀가 내게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엘리아나는 그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예감이 맞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에밀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루크를 노려보고 있었고, 루크는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왜 연락은 무시한 거예요?"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겨울바람처럼 차가웠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밀롱가 안의 소음과 사람들의 시선이 대화를 방해했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건..., "

뭔가 말을 꺼내려했지만, 밀롱가 안의 소음과 타인의 시선은 우리의 대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몇몇 사람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엘리아나 님 죄송하지만, 나가서 이야기하죠."

정중하게 제안하며 에밀리아의 팔짱을 풀었다. 에밀리는 코웃음을 치며 물러섰고, 엘리아나는 말없이 나를 따라 밀롱가를 나섰다. 뒤에서 루크와 에밀리아의 말다툼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외투가 없어 몸이 떨렸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오자마 카페로 그녀를 안내할까 생각했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이목을 끌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나는 그녀와 건물 뒤쪽 사람이 없는 주차장으로 갔다. 그녀는 가는 동안 한마디 없이 그저 따라올 뿐이었다. 주차장에는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거친 바람만이 우리 주위를 감싸며 온몸을 떨리게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엘리아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복잡한 일이 많아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제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이해 좀 해주세요."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지만, 나조차 설득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데요?"

차분한 목소리 속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냥, 미쳤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제가 정말 미쳤던 것 같아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라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변명해야 한다는 사실도 스트레스였다.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걸까. 한 번쯤 연습을 빠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따지고 드는 걸까.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연습은 빼먹고, 밀롱가는 가고 싶었던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떨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연락이라도 했어야죠. 대회 나가자며 파트너십을 말했던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건가요? 지금 이런 말 하려고 불러낸 건가요?"

내가 말하려는데, 그녀가 말을 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제가 지금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 저도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계속되는 그녀의 말에 짜증이 올라와 참지 못하고 욱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구제 불능이네요. 여기에 온 제 마음은 생각이나 해보셨어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네요. 그러면서 무슨 파트너십을 말하고, 의리를 말하셨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눈물을 보며 난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그 말, 이제 그만하세요. 저만 바보 됐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돌아섰다. 단호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붙잡아야 할까, 보내야 할까. 그 순간, 지훈의 말과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겪는 일 중 네 책임이 아닌 건 없어.", "사랑이 아니라도 의리는 있어야죠."


그 말들이 하나로 엉켜 내 안을 울렸다. 지금 이대로 보내면 정말 끝일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리고 있었다. 이 울림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마음 하나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리아나 님,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거 같아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됐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데이빗 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슨 말을 더 해보려 했으나, 그녀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뒤돌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녀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묘하게 단호해 보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잘못했을까?, 분명 나는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상황이 틀어졌을까. 그 순간에도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를 붙잡아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보내는 게 더 나을지 고민이 됐다.


그러나 그 고민 속에서도 내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고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어쩌면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이,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지훈의 말과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겪는 일 중에 네 책임이 아닌 건 없어. 그게 인과의 법칙이다."


"사랑이 아니라도 의리는 있어야죠. 저만 바보가 됐네요."


이 말들이 하나로 엉켜 울림처럼 퍼져 나왔다. 그 울림이 점점 커지면서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를 보내면,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거 아닐까? 그 순간, 내내 무겁게 굳어 있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걸음을 더 빨리했다. 내 안에서 오랜만에 느껴지는 울림이 가슴을 채웠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내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에게 향했다.


"엘리아나 님,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거 같아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됐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데이빗 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슬퍼 보였지만,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 하지만 분명한 결단이 담긴 움직임이었다.


떠나는 그녀를 보며 그 자리에 선 채 되뇌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잘못했을까?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왜 이토록 어긋났을까. 붙잡아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보내야 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도 내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오히려 그녀가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책임을 회피하려는 순간, 지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네가 겪는 일 중에 네 책임이 아닌 건 없어. 그게 인과의 법칙이다."

그리고 엘리아나의 말도 떠올랐다.

"사랑이 아니라도 의리는 있어야죠. 저만 바보가 됐네요."

그 말들이 내 안에서 하나의 울림으로 번져갔다. 마치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닌, 내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처럼 들렸다.

지금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정말 끝일지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무겁게 굳어 있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는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분명한 울림이 가슴을 채웠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내 마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울림을 따라, 그녀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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