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o 15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저도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데이빗 님께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원래 같았으면 그 빈틈을 파고들어 엘리아나 님을 데려가 보려 했을 겁니다."
루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요. 그런데 뉴스타를 준비하는 두 분을 보며 예전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정말 순수하게 탱고를 좋아하던 그 시절이요. 오래지 않아 탱고에 잡아먹히듯 살게 됐지만, 그럼에도 그만두지 못하는 건 탱고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겠죠."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적어도 이제 시작하는 두 탱게로스가 탱고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과거의 내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열정이 있고, 탱고가 있는 한 계속 춤췄으면 합니다."
항상 당당하고 날카롭던 그가 이렇게 진심 어린 말을 내뱉다니 놀라웠다. 그 안에 숨겨진 열정과 부끄러움, 그리고 회한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루크님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지금의 나를 보는 시선 또한 다를 것 같았다.
"자존심, 그걸 내려놓으세요."
단호한 대답이었다.
"자존심이 뭐가 중요합니까?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고, 상대보다 앞서고 싶은 그 마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할수록 놓지 못하는 마지막 실락(失落), 그걸 내려놓고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루크의 말은 잔잔했지만 깊고 단단했다.
"상처를 준 상대에게 사과하는 것,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잘못한 일을 그녀가 용서해 줄 때까지 용서를 구하는 것, 그리고 함께 뉴스타에 나가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게 있나요? 무엇이 더 중요하죠?"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제가 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저는 끝까지 용서를 구할 겁니다. 그게 책임지는 거죠. 그리고 함께 뉴스타를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부탁할 거예요. 적어도 엘레이나 님은 지금 그걸 원하고 있잖아요. 그 기회를 제발 버리지 마세요."
말을 마친 루크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엔 단단한 힘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따뜻하고 진심 어린 악수였다. 그리곤 말없이 뒤돌아 사라졌다. 밤바람이 지나가듯, 조용히, 담담하게.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따가운 바람에 자꾸 눈이 감겼다. 이야기를 정리해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하도 울어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희망이 있었다. 엘레이나가 그렇게 가버리고 가망 없는 일에 온 힘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었다. 콘서트 이후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막막했다. 정말 될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기에 어두운 바다를 빛없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울고, 토해내고, 고통스러워했던 마음 위에 처음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원수 같던 그가 내게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적어도 나 혼자만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희미하지만, 길이 보였다.
막막했던 길. 그녀 없이 갈 수 없는 길이라고 여겼던 길. 그 길의 끝에, 처음으로 '나'가 아닌 '우리'가 있다는 상상이 가능해졌다.
두 눈을 감은 채 손바닥을 얹었다. 부은 눈을 차가운 손바닥이 어루만졌다. 바람에 식은 온기가 붓기를 조금 가라앉히는 듯했다. 머리는 아프고 몽롱했지만 의식은 서서히 또렷해졌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정했던 목표는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그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문득, 연락을 피하던 스승님이 떠올랐다. 과거를 덜어내야 진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이제야 깨달았다. 자윤이 알려줬고, 루크가 일깨웠다. 흘러간 마음을 정리하고 온전한 마음을 찾기 위해 스승님께 메시지를 남겼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거를 정리할 때였다.
[스승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늦게서야 마음을 조금 정리하고 연락드립니다. 잘 계셨나요?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깊은숨을 내쉬었다. 작은 떨림이 있었지만, 그건 두려움보다는 용기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