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루나 2 - 히로 14

Giro 14

by 양희범

극장에서 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열어 보니 자윤이었다.


[더 이상 서로 인연의 끈을 두지 말아요. 자유로워집시다. 무심(無心)으로 지냅시다.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요. 제가 성장하기 위한 좋은 경험이었다고 믿습니다. 이제 각자 갈 길을 가며, 서로를 응원하기로 해요. 이제는 그저 같은 종교를 믿고, 대의를 실행해 가는 도반입니다. 아무런 심정도 없으니 마음 편하시길 바라고, 원하는 바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자윤의 메시지를 읽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위로였다. 단 한 번도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 적 없던 건 나였다. 이 메시지를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봐주던 사람이 자윤이었다는 것을. 극장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흐느끼지 않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네온사인에 젖은 얼굴이 밤거리에 비칠 때마다 창피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홍대의 밤은 유난히 붐볐다. 사람들을 피해 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걷다 보니, 엘리아나와 처음 갔던 그 밀롱가 앞이었다.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쪼그려 앉아 오열했다. 가슴속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듯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인기척이 나서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자리를 뜨려는데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돌아보니 루크가 서 있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꼴을 그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손을 뿌리치고 벗어나려 하자, 그가 불러 세웠다.


“데이빗 님, 잠깐만요. 이야기 좀 합시다.”

그의 목소리에는 악의도 적의도 없었다. 오히려 당황 속에 스민 걱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순간이 편하지는 않았다. 무시하고 가려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그날은 미안했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간절한 호소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루크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하루 종일 일한 티가 났다. 머리는 번들거렸고, 나는 한참을 울었던 탓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런 모습이 약점처럼 느껴져 껄끄러웠다. 하필 상대가 루크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묘하게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멈춰줘서 고마워요. 저번 밀롱가에서는 제가 미안합니다. 홧김에 그런 선택을 했어요. 그 일로 두 분 관계가 그렇게 완전히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다. 나는 당혹스러워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부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저도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도 탱고를 사랑합니다. 탱고를 출 때만큼은 사랑받는 기분이거든요. 에밀리아와 제 사이에서 두 분이 피해를 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탱고를 하며 사고해본 적은 없는데, 두 분은 달랐어요. 정말 탱고를 사랑한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와 에밀리아는 대회를 준비하며 연인이 됐습니다.”


그는 내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그의 말은 이상하리만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대꾸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흩어지는 게 느껴졌어요. 함께 연습하는 게 불편해졌고, 오히려 탱고가 더 못해지는 것처럼 느껴져 힘들었죠.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하니 마음 둘 곳이 없어 바깥으로 시선이 갔습니다. 밀롱가에서 다른 사람들과 춤추는 게 더 즐거워졌고, 그러다 보니 둘 사이가 소원해졌어요. 상처를 주려고 서로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가 더 잘 춘다, 내 말을 따라라’—그 말을 몸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던 중 엘리아나와 데이빗 님이 눈에 들어왔어요.”


“두 분의 장난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는 말인가요?”


“아뇨. 정확히 말하면 그럴 의도는 없었죠. 다만 두 분 모두 미래가 기대되는 탱게로스였으니 관심을 갖고 함께 춤을 추다 보니 일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물론 이성으로서, 혹은 예비 파트너로서 마음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두 분이 사라지고 나서 에밀리아와 크게 다퉜습니다. 그녀는 이미 끝났다고 했지만 사실 제대로 끝맺은 건 아니었거든요. 각자 갈 길 가자고 하고, 울며 나가던 엘리아나 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걱정되기도, 미안하기도 해서요. 전화를 받으시더니 그러시더군요. 탱고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본인이 부족해서 데이빗 님이 에밀리아와 다니는 거라고—그래도 탱고만은 잘하고 싶다고. 데이빗 님에게 실망과 배신감이 크지만 이해는 된다고요. 뉴스타 부문에 꼭 나가고 싶은데, 자신이 부족한 탓에 더는 데이빗 님을 괴롭히면 안 될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남 탓 대신 자신을 돌아보는 그 순수한 열정에 제가 반성했습니다.”


“엘리아나 님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네. 모르고 계실 것 같아 전합니다. 저도 파트너십을 할 때 에밀리아에게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이것만, 저것만—바라는 것 투성이였죠. 다른 사람들은 제 탱고를 사랑하고, 그 탱고를 통해 저를 사랑해 주는 것 같은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런 태도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더 나쁘게 굴기도 했고요. 아마 제 방법이 틀렸던 걸 겁니다. 두 분을 보며 느낀 게 있어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놓치지 마세요. 여기서 두 분의 파트너십이 끝나면 안 됩니다.”


루크의 말은 진심으로 들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전 28화메디아 루나 2 - 히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