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으로 걷는 춤

heart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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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흐르기 전, 우리는 먼저 마음을 맞춘다. 오늘의 숨은 길고 짧은가, 마음은 밝고 어두운가. 마음이 바쁘면 발이 음악을 앞지르고, 마음이 느긋하면 파우사도 문장이 된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건 늦게 가겠다는 뜻이 아니라, 음악의 시간 위에 발을 올리겠다는 약속이다.


밀롱가의 조명이 낮게 깔린 밤, 눈빛이 오가다 스치듯 비켜간다. 까베세오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에도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눈빛에는 질문이 담겨 있다. 질문에는 언제나 여러 답이 있다. “이번 곡은 아닌가 봐요.” 그뿐이다. 의자에 기대어 네 번 깊게 들이쉬고, 네 번 길게 내쉰다. 호흡이 정리되면 마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음 곡을 위한 공간을 조용히 비워 둔다.


심장으로 걷는 춤, 탱고를 마음으로 추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 누구도 탓하지 않는 태도, 고마움을 잊지 않는 습관, 몸이 보내는 신호를 기꺼이 수용하는 자비,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끝까지 듣는 경청. 이 다섯 가지가 준비되면, 발은 자연스레 그 마음의 문장을 따라 걷는다.


첫 번째는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마음이다. 어떤 일이든 서두르면 그르치기 마련이다. 탱고 또한 마찬가지다. 까베세오를 할 때 서두르면 상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놓치고, 그것을 혼자만의 신호라고 여기며 상대를 난처하게 할 수 있다. 춤에서도 그렇다. 춤이 꼬일 때도 있다. 바닥이 미끄러웠거나, 둘 다 같은 소리를 다른 귀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성급했을지도 모른다. 조급한 마음을 모른 채 성급하게 원인을 찾다 보면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이 가기 쉽다. 모든 것은 느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느긋하게 음악을 들으며 함께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상상하고, 상대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확인하며 둘이서 춤을 출 때 우리는 진정 탱고를 출 수 있다. 춤을 잘 추고 싶다거나 음악을 표현하고 싶다거나 하는 성급한 마음이 모든 걸 송두리째 망친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두고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너그럽게,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서로 심장을 맞대고 가슴으로 탱고를 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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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남을 탓하지 않는 마음이다. 성급하다 보면 반드시 잘잘못을 가리게 되고 그 가운데 범인을 찾는다. 범인을 찾다 보면 자연스레 탓이 남는다. 탓은 너무나 쉽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나의 잘못을 책임을 지지 않으면 그 상황은 쉽게 무마된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 상대의 잘못도 탱고에서는 나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춤은 둘이서 완성하는 춤이기 때문이다. 춤이 어딘가 잘못됐을 때, 그때 탓을 찾는 대신 춤의 대화를 고친다. 아브라소의 압력을 살짝 풀고, 리드는 제안을 부드럽게 낮추며, 팔로는 몸의 문장을 한 박 더 또렷하게 쓴다. “여기서 다시 시작할까요?” 짧은 속삭임 하나면 충분하다. 잘못을 가르는 칼날보다, 다시 잇는 실이 춤을 살린다.


세 번째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이다. 감사는 춤의 조명을 바꾼다. 첫걸음 전에 눈웃음으로 “반가워요”, 마지막 박자 뒤에 “고마워요”를 얹는 일. 그 한마디가 방어를 내리고, 서로를 환영하게 한다. 오늘의 작은 오해와 작은 구원을 함께 통과했다는 증표가 남는다. 오래 기억되는 탄다는 화려함보다 이 고마움의 온도다. 상대가 없으면 춤은 출 수 없다. 탱고에서 (춤을 함께 추는) 상대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대상이다. 탱고를 혼자 추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내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탱고는 오로지 둘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춤이다. 혼자서 음악을 듣고 표현한다고 완성되는 춤이 아니다. 음악과 론다 안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춤이다. 그렇기에 상대에 대한 감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상대가 없다면 춤을 출 수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중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네 번째는 몸이 말하는 신호를 듣는 마음이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탱고를 완성하는 건 마음일지라도, 몸이 없다면 탱고는 없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춤을 추게 된다면 그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무릎 상태와 지금 나의 컨디션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는 춤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춤을 추는 중에 내 몸이 보내는 언어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잊지 말자. 어깨가 굳은 날엔 회전을 줄이고, 발바닥이 예민한 날엔 길게 걷는다. 멈춤이 필요하면 멈춘다.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배려다. 내 몸을 배려하는 마음이 파트너에게도 전해져 둘의 축이 한 박씩 가까워진다. 몸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을 때, 마음은 더 멀리 여행할 수 있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건 경청하는 마음이다. 경청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의 언어를 알아들었다면, 파트너의 흉곽이 내는 미세한 리듬, 숨이 빨라지는 순간, 균형이 살짝 기울어지는 방향을 듣는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면 리드는 지시에서 초대로, 팔로는 추종에서 공저(共著)로 바뀐다. 우리는 스텝을 ‘완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감정을 춤으로 ‘번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작은 장면 하나. 미세한 떨림이 우리의 언어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상상해 보자. 붐비는 론다에서 누군가가 옆을 스치며 공간이 좁아진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깨를 한 번 낮추고 음악의 숨에 기대어 멈춘다. 밴도네온이 길게 울자 그 길이만큼만 걸음을 늘린다. 서두르지 않자, 앞에 없던 길이 열린다. 또 다른 장면. 내 발끝이 파트너의 구두를 살짝 밟았다. 미안함이 번개처럼 지나간다. 나는 압력을 줄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같은 만큼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서로의 실수를 벌하지 않고 문장으로 바꾼다. 그 순간부터 춤은 더 조심이 아니라 더 믿음으로 움직인다. 마지막 장면. 네 곡을 마치고 손을 놓는다. 손바닥의 온기가 천천히 식는 동안, 마음이 말했다. 잘 보여주려고 애쓴 밤이 아니라, 잘 느끼려고 애쓴 밤이었다고. 존재감은 눈에 띄는 장치가 아니라 귀에 들리는 심장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를 느낀다.” 이 한 문장을 아브라소 속에 넣어 두면, 다음 곡의 첫걸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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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를 잘 춘다는 건 더 많은 동작을 ‘해냈다’가 아니라, 더 많은 마음을 ‘건넸다’에 가깝다. 서두르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고마움을 잊지 않고, 몸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상대의 마음을 듣는 일. 이 다섯 가지 습관이 쌓이면, 기술은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는다. 결국 탱고는 몸으로 보이고 마음으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몸이 아닌 마음으로 췄을 때, 우리의 몸이 가장 아름답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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