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시따, 당신과의 미묘한 거리

Calesita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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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시따(Calesita)는 회전목마다. 회전목마는 같은 자리를 돈다. 그 돌고 도는 말의 등에서 밖을 보면, 그 어떤 것도 멈춰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회전을 만드는 중심 기둥, 회전의 축이다. 그 아름다운 여정이 멈추지 않게, 끝나지 않게, 회전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것. 그게 리더의 역할이다.


팔로워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혼자서 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모두가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또 아무리 팔로워의 역량이 좋아도 회전이 완성되려면 리더의 동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진짜로 도는 게 발이 아니라 거리라는 사실이다.

너무 멀어지면 축이 흔들리고, 너무 가까우면 축을 건드린다. 그 둘 사이, 한 장의 얇은 공기. 행성이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해내듯, 우리는 서로의 주변을 돌면서도 각자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미묘한 거리감이 무너지면 궤도는 금세 비뚤어진다. 탱고든 관계든, 결국 중요한 건 거리의 온도다.


하나의 장면. 나는 당신을 중심으로 아주 얕은 원을 연다. 상체는 당신을 바라보지만,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순간, 궤도를 잊은 채 당신에게 과도하게 다가선다. 음악의 유혹에 휩쓸려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프레임의 압력은 종이 한 장 두께, 그 사이로 음악의 열기가 바람처럼 통과한다. 그런데 그 열기가 이 순간 나만 향한다. 나는 당신의 공간을 침범했고, 당신의 축이 흔들린다. 우리의 여정이 시작도 끝나기도 전에, 당신이 음악의 열기에 몸을 맡기기도 전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 나는 멋쩍게 웃지만, 그 미소 뒤엔 내 어설픔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당신에 대한 미안함이 스민다. 가장 아름다운 칼레시따는 닿을 듯 말 듯,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는 거리에서 완성된다.


이건 마치 행성의 궤도와 같다. 수많은 공전과 자전이 반복되는 우주는 작은 오차에도 흔들리고 폭발한다. 가까우면 타고, 멀면 얼어붙는다. 케플러의 법칙을 모르는 몸일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을 안다. 주기와 반지름, 회전이 가팔라질수록 원은 더 얕아져야 하고, 음악이 길어질수록 호흡은 더 길게 눕혀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애착을 핑계로 상대의 축까지 차지하려 들면 공전은 깨지고, 두 행성은 서로의 표면을 긁는다. 반대로 무심을 핑계로 거리를 벌리면 소리는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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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장면. 붐비는 론다에서 당신을 중심으로 회전을 시작한다. 스커트 자락이 나풀거리고, 옆 커플의 발끝이 그림자처럼 스친다. 당신의 축이 내 쪽으로 무너져 내린다. 시선은 내면이 아니라 바깥을 향한다. 당신의 우주가 무너지려 한다. 그 중심을 지키려 나는 당신의 무게를 부드럽게 받아낸다. 그때 데일 카네기의 문장이 떠오른다. 비판·비난·불평으로는 원을 지킬 수 없다. 대신 ‘우리’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채운다.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진심으로 관심을 보낸다. 오늘의 숨, 발바닥의 미세한 떨림. 그 신호들을 먼저 듣자, 원은 조용히 다시 궤도를 그린다. 우리의 우주가 론다 위에 자리 잡는다. 그 안에서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라.” 그 말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가 만드는 춤은 보여주기가 아니다. 보여주려는 회전이 아니라, 안심하고 설 수 있는 궤도다. 행성과 행성이 공존할 수 있는 원(圓). 회전의 중력은 나의 과시에서가 아니라 당신의 존재에서 생긴다. 나는 한 뼘 뒤로 물러서 우리가 머물 공간을 준비하고, 당신은 그 중심에서 숨을 내쉰다. 그 순간, 주도권이라는 말은 무색해진다. 존재로서 당신을 수용하는 태도가, 우리의 관계를 높인다.


가끔은 실패한다. 음악이 절정에 다다르고, 내 욕심이 천장을 뚫을 때, 상체가 마음을 따라 과하게 돌아간다. 방향을 잃고, 당신을 보지 못한다. 당신의 발끝이 잠깐 들리고, 궤도는 찢어진다. 상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때 잠깐 멈춰 숨을 고른다. 음악과 당신을 다시 느낀다. 서로를 이끄는 미세한 힘,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끌어당긴다. 궤도가 자리를 찾는다. 나는 당신의 안정된 공간에 작게 미소와 감사를 보낸다. 그 마음은 말로 전할 수 없다. 눈빛과 분위기의 온도만이 그 자리를 말해 준다. 그 온도가 궤도를 원래 자리로 데려온다.


어쩌면 우리가 맺는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너무 밀착하면 상대의 자전을 방해하고, 너무 멀어지면 다시는 돌아오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끌어당기는 힘은 약해지고, 궤도는 사라진다. 적당한 거리가 서로를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 원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먼저 당신의 숨을 듣는다.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질문으로 제안한다. 여기서, 괜찮을까. 침묵의 언어는 오로지 춤으로만 오고 간다. 균형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작게 기뻐하고 지나간다. 과시하지 않는다. 칼레시따의 원은 기술이 아니라 거리의 미학임을 안다. 가까워질수록 상체는 더 고요하게, 멀어질수록 프레임은 더욱 당신을 향해. 그 미세한 조절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자전과 공전을 함께 지킨다.


마지막 장면. 현악기가 바닥을 깔고, 마지막 궤도를 그릴 순간이 다가온다. 나는 원을 아주 작게 줄인다. 너와 나 사이에 한 장의 바람만 남긴다. 가까워질수록 상체는 더 고요하고, 멀어질수록 당신을 향한 아브라소는 더 다정하다. 이 미묘한 거리가 칼레시따를 만든다. 행성들은 그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우주를 건넌다. 우리도 오늘의 우주를 건넌다. 춤이 끝나도 궤도는 닫히지 않는다. 아주 짧은 공간을 남겨 둔다. 눈빛으로 묻는다. 이 거리, 편했나요? 당신은 눈빛으로 답한다. 너와 나의 자전을 지키면서, 같은 공전을 가능하게 하는 순간. 그 거리를 알면, 관계도 덜 흔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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