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가 아닌 우리, 상꾸치또

Sandwich

by 양희범

조명이 낮아지고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급해진다. 이 곡에는 춤을 춰야 해. 누구랑 추지? 얼른 까베세오를 해야지. 여러 생각이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함께 춤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혼자서 즐기겠다”는 충동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거친 리드와 욕망만 남는다. 그러나 리드는 명령이 아니라 방을 짓는 일이다. 끌기보다는 내려놓기, 밀기보다는 받쳐 주기. 한 발 뒤로 물러선 그 자리에서 너의 선이 떠오른다. 마치 어둠이 물러나며 별자리를 드러내듯. 그리고 알게 된다. 이 밤의 주어는 너도 나도 아닌 우리라는 것을.


동작을 내기 전, 발바닥으로 바닥의 온도를 읽는다. 여백은 공백이 아니다. 여백은 네 호흡이 잠시 앉을 의자다. 내가 의자를 내밀면, 너는 앉을지 말지를 고른다. 그 선택의 자유가 곧 우리의 신뢰다. 혼잡한 론다의 밤, 앞의 스커트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옆의 발끝이 가까이 스친다. 박자마다 동작들이 찍히고, 발걸음·호흡·상체의 움직임이 빈틈을 채우려 한다. 때로 그 흐름이 버겁고 무거울 때가 있다.


“과해요, 힘들어요.” 그 말이 가슴까지 차오르려는 찰나,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에게는 멈춤이 필요하다. 발을 가져다 댄다. 힐 아래, 무방비하게 음악을 기다리는 너의 발을 다치게 하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으로. 아브라소의 압력을 반 박 낮춘다. 열린 가슴은 대답을 미루고 질문을 남긴다. 네 발이 소리 없이 내 여백으로 스며든다. 도망치지 않도록, 다른 쪽 발로 조용히 감싸 준다. 잠시 우리는 떨어진 채 서로를 바라본다. 아브라소는 열려 있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변함없다. 우리의 길은 선으로 그어졌고,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 수많은 밀롱가의 그림 중, 남아 있는 한 폭은 우리뿐이었다.


샌드위치(상꾸치또)를 하는 내 마음도 같다. 가운데 낀 너의 발이 얼마나 취약한지 기억한다면, 끼우는 기술보다 감싸는 품이 먼저다. 낮고 짧게, 너의 공간을 먼저 보고, 붙잡기보다 돌려보내기를 더 아름답게 준비한다. 이 한 박의 체류는 “내가 너를 사이에 둔다”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작은 방을 연다”는 뜻. 그 방 안에서 우리는 잠깐 하나의 문장을 공유한다.


낯선 우리에게도 문장은 생긴다. 그 밤을 채울 문장은 간초일 수도, 바리다일 수도, 파우사일 수도 있다. “괜찮다면 여기서”와 “지금은 아니야”를 같은 무게로 받는다. 리드는 통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요람의 온도다. 우리의 탱고가 포근함으로 감긴 온도로 남을 때, 비로소 우리가 된다. 재촉하지 않음, 기다림의 온도, 돌아감의 품위—이 셋이 모이면 스텝은 기술을 넘어, 기억에 남아 추억될 탱고가 된다.


실수가 스며든 밤도 있었다. 음악이 절정에 닿자 내 상체가 욕심을 따라 과하게 돌았고, 너의 발끝이 가볍게 떠올랐다. 호흡이 반 박 어긋났고, 춤은 툭 끊겼다.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그림을 바꿨다. 더 길고 화려한 길 대신, 낮고 넓은 방. 아브라소의 압력을 한 치 낮추고, 우리의 원을 얇게 그려 여백을 넓혔다. 너의 발에 나의 발을 가만히 맞닿게 멈춘다. 호흡을 고르는 네가 보인다. 우연처럼 서로가 서로를 본다. 너의 어깨선이 한 겹 풀리고, 우리의 선은 다시 이어졌다. 좋은 리드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샌드위치는 그 자리를 만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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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에 리더로 선다는 건, 책임 없는 쾌락을 즐기는 게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내가 보여 줄게”가 아니라, “내가 있을게, 네가 들리도록.” 우리의 언어는 말이 아니다. 탱고라는 언어가 밀롱가를 가득 채울 뿐. 너의 사전에서 단어가 하나둘 펼쳐지고, 우리는 그 단어들을 이어 우리의 문장을 쓴다.


마지막 곡으로 딴다가 저문다. 아주 짧은 눈빛과, 닿아 있는 발의 느낌으로 너를 읽는다. 포근한 온도를 더하고 눈빛으로 묻는다. 오늘의 방은 편했나요. 너의 눈빛이 답한다. 충분했어요. 론다에 가득 찬 열기가 숨결로 퍼진다. 공기가 사각 하고 자리 잡는다.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 걷는 법을, 이 낮은 조도의 순간마다 배워 간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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